- 마5장1-4 애통하는 자의 복(16.06.12)
- 김태규 2016.6.12 조회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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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장1-4 애통하는 자의 복 88, 190(177), 427(516)
몇 주 전에 저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죄인이 다른 방법으로는 죄를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면서 “나는 예수 없이는 못 삽니다”라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에 이어서 “애통하는 자의 복”에 대해서 같이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본문 4절을 보시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 “애통”이라는 말은 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운다”는 말은 그냥 눈물을 조금 흘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펑펑 울어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눈물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약 9가지 정도 있는데,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애통”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펜데오”(πενθεω)로써, 이 말은 슬픔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 가장 강한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mourning을 하는데, 어떻게 mourning하느냐 하면 wailing하면서(울부짖으면서) mourning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눈물과 더불어 터져 나오는 그런 격심한 비통을 뜻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이 그렇게 애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야곱은 요셉을 극진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짐승에게 찢기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아들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물론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여 미디안 사람의 손에 팔아먹고 난 후, 이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야곱에게 거짓말을 하였지만,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야곱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애통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34절에서 보는 것처럼 옷을 갈기갈기 찢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두르고, 땅을 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음부에 내려가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런 통곡을 표현할 때, 히브리어로는 “아발”이라고 하는데, 헬라어로는 ‘펜데오’(πενθεω)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사용하신 “펜데오”라는 애통이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힘든 세상에서 웃고 살고 싶은 현대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즉 울어도 보통 우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찢고, 아파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자가 복을 누린다고 하니, 이 말씀이 쉽게 이해되기 보다는 오히려 부담스럽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과 연결시키면 이해가 가능합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는 이 죄를 스스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는 ‘주님, 나는 이제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주님 밖에 없사오니 주님이시여 내 심령에 오셔서 나를 다스려주옵소서’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누구든지 자신이 그렇게 심령의 가난함을 경험하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애통”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죄인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알고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부르는데, 어떻게 불러야겠습니까?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나님, 저는요 예수님이 필요해요” 이래야 되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것입니까?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가 자기가 KAL기 폭파의 주범임을 고백하고는 한없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훈련을 받을 때는 인간미를 잃어버린 짐승 같았지만, 그래서 KAL기를 폭파한 후에 잡히자 자살을 하려고 극약을 입에 깨물었지만,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나서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하나 하나 깨달아 가게 되자, 울면서 자기의 잘못을 토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나도 여자이고 싶다”라는 책까지 내었습니다. 이게 바른 인간미를 회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심령의 가난함을 느낄 때에는, 자연적으로 어떤 결과가 따라 오느냐 하면 “애통하는 마음”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만약에 말은 “나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라고 하면서도 애통함의 자세가 없다면, 그 심령은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심령이 가난하면 그 다음에 분명히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 저는 예수님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 없으면 망합니다.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를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며, 아파하며, 울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껏 주님의 뜻대로 따르지 않고 내 맘대로, 내 고집대로 행동하며 온갖 죄를 다 지은데 대한 잘못을 주님 앞에 고하면서 “주님, 이제는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주님, 제 마음에 오셔서 제 인생의 키를 운전해주십시오” 라고 눈물 흘리면서 결단하고 각오하는 그런 애통의 자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과연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오늘날에는 참으로 울지 말아야 할 것을 위해서 울고, 진정 울어야 할 것을 위하여 울지 않는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억울해서는 울고, 분해서는 우는데, 죄 때문에는 울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경우가 허다했음을 보여줍니다. 삼하 13:2절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다른 형제인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모하면서 “울화로 병이났다”고 하는데, 여기 “울화”라는 말은 “애통”의 일종으로, “괴로워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애통은 옳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말은 여동생이기에, 정복해서는 안 될 여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그녀에 대한 ‘애타는 정욕’으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욕심과 좌절에서도 눈물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눈물을 흘린 결과가 무엇입니까? 거짓을 꾸며 강제로 다말을 겁탈하고 이 일로 인하여 암논은 압살롬에게 살해를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욕심과 좌절 때문에 운 결과가 이렇게 무섭게 나타났습니다.
삼상 15:24절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애통해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애통은 진정한 애통이 아니라 위장된 애통이요, 건성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애통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원에 올라가보면 소리 높여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중에는 진정한 애통을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혹자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냥 웁니다. 때로는 사업문제 때문에, 부부문제 때문에, 자녀문제 때문에 막 울어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애통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들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는 서양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선교사님이 어느 교회에서 저녁 집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는데, 앞에 앉으신 어떤 할머니가 선교사님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막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님이 참 기뻤습니다. “아, 저 할머니가 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는 막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그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 설교시간에 왜 그렇게 우셨어요? 은혜 받으셨나요?” 라고 했더니, 이 할머니의 말이 걸작입니다. “아니, 난 며칠 전에 죽은 우리 집 강아지 생각이 나서 울었어요. 우리 집 강아지가 선교사님의 눈깔이랑 똑 같은 색깔이었거든요” 라고 하더랍니다. 어이없는 일이지요. 세상에는 이런 울음도 있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 51편을 보면 다윗이 진정한 애통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애통하면서 지은 시인데,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해 마음을 아파하며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침상을 적실만큼 울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보듯이 “주님, 나를 주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시지 마소서”라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여러 번 애통하였습니다. 죄를 깨닫고 애통하고, 넘어지면 또 애통했습니다. 처음의 애통은 갈릴리 바다에서 만선을 경험하고 애통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애통할 때 주님은 “아니다. 나는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 그는 닭소리를 듣고 또 다시 애통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고 물고기 잡으러 떠났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심을 듣고는 요 21:17절에서 보는 것처럼 “베드로가 근심했다”라고 하는데, 여기 “근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뤼페오”(λυπεω)로서, “고통을 느끼며 슬퍼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본 것처럼 참된 애통은 죄 때문에 우는 것인데, 그런 애통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이런 애통을 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복되게 하신다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다시 4절을 보시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위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εω)인데, 이 말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숨을 헉헉거리며 달릴 때, 누군가가 옆에 가서 함께 달려주며 물병도 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는 자의 곁에 오셔서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면서 기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4-16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화를 하시면서 “내가 떠나가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보혜사”라는 말이 바로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위로한다”는 말이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εω)로서, 보혜사라는 말과 같은 어원임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세상이 주는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파라클레토스, 즉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힘없고 연약한 제자들, “이제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믿음에서 승리하도록 돕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위로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순간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을 아파하며 탄식할수록 위로의 성령님께서 곁에 오셔서 격려해주시고 붙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염려 마라, 괜찮아. 이제 너는 용서받을 수 있어. 이제 너는 소망이 있어. 이제 너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어...” 그렇게 위로하시면서 세상에서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도록 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사시는 동안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위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은 마치 야곱이 창 47:9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나그네 삶이요, 험악한 세월을 보내야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죄로 인해서 울어야 하고, 때로는 고달픈 삶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을 바라보며 울 때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시 34:18절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썼습니다. 성령의 위로를 깨달았기에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시 51: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 또한 이미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오는 가를 알기 때문에 깨어지고, 상처난 심령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심과 어루만지심을 바라면서 죄를 자복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애통할 때 하나님은 그를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를 역사의 무대 위에 우뚝 세워 당대의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의 위로로 지옥의 권세도 이겼다면, 이 세상에서도 세상을 힘 있게 도전하면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달란트가 크다면 그것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영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많이 나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로 다윗을 보면, 그는 범죄 후에 침상이 젖도록 울었기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 1:1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소개합니다. 범죄하여 침상이 젖도록 애통했던 그가,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짐을 선언하는 곳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현재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별이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애통한 대가의 위로라고 말한들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울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은 볼 수 없지만 그가 얼마나 울었을까? 하는 추측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맨 정신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극심한 애통을 통해서 가능한 고백입니다. 그런 바울을 하나님은 어떻게 위로하셨습니까?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다음의 위치에 그를 두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러한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당대의 영웅호걸들은 다 잊혀졌는데도 갈릴리 어부였던 베드로는 오늘에도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시나요? 내 속에 있는 죄성을 아파하며 애통해보신 적이 얼마만인가요? 이제 애통의 자리로 다시 나가보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래서 위로의 성령님이 곁에 오셔서 새 힘을 북돋아주시는 것을 경험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세상에도 위로가 있지만, 그 위로는 잠깐입니다. 부모의 위로도 잠깐이고, 친구의 위로도 잠깐이고, 아내와 남편의 위로도 잠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들의 생애 동안 항상 같이 계시면서 당신이 회개한 만큼 회복해주시고, 회생시켜주실 것입니다! 이런 위로가 여러분들의 것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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