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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장 1-13 하나님을 만난 사람(16.07.03)
김태규 2016.7.4 조회 673

61-13 하나님을 만난 사람 10(34), 597(378), 338(364)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를 펼쳤습니다. 이사야라는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인데, 그는 두 아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살면서 주전 759년부터 699년까지, 그러니까 유대 나라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정 때까지 약 60년 동안 활동했던 유명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더욱 유명한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실 것과, 그분의 오심은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가장 많이 애용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이름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그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었지만,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대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위인이 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이 본문은 그를 위대한 선지자가 되게 한 key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본문에는 3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고, 다음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의 실체를 파악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이 세 가지 사실을 같이 조명하며 피차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따라서 우선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난 사실부터 봅니다. 1절에서 보는 것처럼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의 어느 날 성전에서 아주 놀라운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고, 그 모습은 장엄하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3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에, 다시 2절을 보면, 천사들은 감히 그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어 얼굴을 가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보는 것처럼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부르는 찬송은 문지방의 터가 요동할 정도로 우렁찼다고 하며, 이에 여호와께서 임재하심으로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렇게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장엄하시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만난 곳이 어디였으며, 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요? 우선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 곳을 보면, 다른 곳이 아닌 성전이었다고 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갔다는 표현은 이렇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교만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스스로 하려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무덤도 열왕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따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왕은 하나님의 징계로 죽임을 당하고, 정국은 어수선하였으니, 이런 일은 선지자 이사야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마음이 슬프고 허전하여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현실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간절한 심정으로 성전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래, 이런 때는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어. 하나님을 만나야 해. 하나님만 이 난국을 해결하실 수 있는거야...‘ 이런 마음을 가지고 무거운 짐을 풀기 위하여 성전을 찾아 기도했을 것인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하나님은 편재해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니 계시는 곳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도 계시고 깊은 음부에도 계십니다. 저기도 계시고, 여기도 계시며, 내 속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꽉 차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인간을 만나시기 위하여 특정한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죄 짓고 숨었을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면서 아담이 숨은 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나타나주셨습니다. 호렙산의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나타나주셨고, 미디안의 세력 앞에서 두려워서 떨던 기드온에게도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 외의 여러 사람들에게도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게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성전을 찾아 기도하였고,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나타나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성경 한 구절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8:17입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열심을 내어 간절히 찾을 때 하나님은 만나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원하신다면, 신령한 눈을 뜨시기를 원하신다면, 이사야처럼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사모하는 마음만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간절히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사야처럼 성전으로 나오셔서 그분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기가 대단히 식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여호와를 사모하는 마음의 열기가 달아올라 찬양도 예배도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2~3시간 걸리는 곳에도 막 좇아갔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텐트 치고 부흥회 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꽉꽉 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히 식어진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성전에 올라오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성경 한 구절을 또 봅니다. 18:14절 상반절 말씀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루 세 번, 오전 9, 12, 3, 이렇게 세 번씩 기도하는 규례가 있었기에,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올랐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겠지만, 성경은 이들 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기도하던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죄인이라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하던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올라온 두 사람 중에서 바리새인을 만나주시지 않으시고 세리를 만나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바리새인은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에 올라와서는 세리처럼, 이사야처럼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살필 것은 이사야 선지가가 하나님을 만나 후에 자신의 실존을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너무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는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면서 말하기를 큰일 났구나(화로다)! 이제 나는 죽는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며, 또한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틈에서 살아온 죄인이다. 이토록 부정한 내가 어찌 만군의 여호와, 거룩하신 주님을 뵈올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고통하며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비로소 자신의 실존을 알게 되고는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눅5장에서도 보게 됩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 잡느라 수고하였으나 헛수고만 하고 새벽녘에 허탈한 마음을 가지고 그물을 씻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4절에서 보는 것처럼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했고, 이 명을 받은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하여 다른 배까지 만선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는 8절에서 보는 것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깨끗한 거울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때에만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게 되듯이, 죄인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울 때에는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죄악을 보신 분들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신 분들입니다. 이사야도, 베드로도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솔직히 실토하였는데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실토가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만난 증거입니다.

 

사실, 자신을 깨뜨리지 않고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가 죄인임을 발견하고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몸부림을 치면서 자기를 깨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주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고 몸부림을 치면서 자기를 깨뜨렸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면서 떨었습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은 다시 한 번 죄로 인하여 떨며 몸부림치는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새롭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자기 죄를 실토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런 사실이 6-7절에서 확인 됩니다. 보시는 것처럼 죄로 인해 망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이사야에게, 천사가 제단 숯불을 불집게로 집어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와서는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보라 이제 너의 입술에 제단 숯불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라고 용서의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무슨 교훈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죄 때문에 죽겠다고 몸부림치는 자를 죽도록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용서하시고, 고치셔서 살게 하시고, 평안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무릎을 꿇은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집을 꺾고 자기 전체를 하나님께 맡겨버린 사람에게 분명히 용서의 손길을 주사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1:18-19절 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17절에서도 우리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심중의 죄악을 솔직히 실토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죄로 인해 상처나고 억눌렸던 마음에 위로의 은혜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가 자기 사명을 감당한 사실에 관하여 같이 보십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는데, 8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옵소서라고 지체하지 아니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9절 상반절에서 보듯이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에게 가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순종한 후, 60년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아주 위대하게 쓰임받는 선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학교나 회사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소사라고 하고, 나라의 큰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대사라고 하며, 특별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특사라고 하고, 중요한 비밀을 맡은 사람을 밀사라고 하며, 하나님 곁에서 심부름을 하며 섬기는 자들을 천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혹은 소사처럼, 혹은 특사처럼, 혹은 밀사처럼, 혹은 천사처럼 사용하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소사처럼 되시든지 특사처럼 되시든지 밀사처럼 되시든지 천사처럼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을 내라고 합니다. 3:19절을 소개해 드립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주님께서 관심 밖의 대상에게 열심을 내라고,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에게 열심을 내라고,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름입니다. 여름철은 신앙이 소홀해지기 쉬운 계절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내 신앙이 소홀해지려고 할 때, 내 믿음이 약해지려고 할 때, 이사야가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 사죄의 은총을 입고 위대한 사명자의 자리로 나아갔음을 회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누렸던 은혜를 여러분들께서 계속해서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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