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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8장11-14 또 타야지(25.05.11)
김태규 2025.5.11 조회 21

2811-14 또 타야지 28, 301(460) 299(418)

 

저는 두 주 전에 있었던 EMI 세미나에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저희들이 모였던 세미나 장소는 바울 사도가 로마로 가는 중에 잠시 머물렀던 수라구사 항구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수라구사는 시칠리 동쪽 해안에 위치해 있는데, 지도로 보시면, 저곳이 수라구사 항구입니다.

 

바울이 저 수라구사에 잠시 들리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1:13절을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했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혔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로 가고 싶은 마음을 가졌던 바울이 어떤 방법으로 노력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길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처하면, 포기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다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여전히 그 꿈을 접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지금 당장 성취되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기 보다는,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지향하는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성도로서 지향하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목적지에 쉽게 다다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디고,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경우도 있기에, 그럴 때에는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려고 기다리던 바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로마에 갈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이유로, 유대 동족들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법정에 서게 되었고, 그러자 바울은 아예 로마의 황제에게로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선언하였는데, 총독은 이를 수용하여,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었는데, 때는 늦가을 무렵이었습니다.

 

바울을 호송한 사람은 백부장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면서 처음에는 무시아의 항구 도시인 아드라뭇데노로 가는 배를 탔으나, 거기에서 다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하여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갈아탔는데, 미항을 지나 뵈닉스로 가려고 하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배는 산산이 부서지고 겨우 배에 탔던 사람들 전원이 멜리데 섬에 상륙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도로는 보시는 것처럼 <몰타>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몰타에서 바울로 하여금 기적을 나타내게 하심으로, 그 섬에 복음이 꽃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바울에게 복음을 받았던 보블리오가 주교가 되어 사역한 기념교회가 있고, 바울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바울은 멜리데에서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로마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배를 타야합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배를 타시겠습니까? 먼저 영상을 보신 후에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보신 영상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사방이 어지럽게 빙빙 돌아가는데, 무슨 영상인지를 잘 모르시겠지요? 그런데 다음 영상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 롤러 코스터를 타는 장면입니다. 저렇게 롤러 코스터가 질주하니까, 사방이 빙빙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미국 디즈니랜드에 가서, 저것보다는 조금 덜 심한 롤러 코스터를 타봤는데, 애들이 다른 것도 타자고 하자, 그냥 두 손을 휘저으면서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롤러 코스터는 아니지만, 그들이 탄 배는 풍랑으로 인해 14일 이상 시달리면서,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였고, 모든 것을 바다에 버려야 했으며, 배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겨우 목숨만 건지는 일이 있었기에, 그런 경험을 한 바울은, 또 배를 탄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트라우마에 약하기에, 파선을 경험한 바울도 트라우마가 없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배를 탔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오늘 설교 제목을 <또 타야지>라고 잡았습니다. 바울에게는 풍랑과 파선의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또 배를 타고 목적지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도전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가야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지에는 아무렇게나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고,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천국에까지 도달하려면 많은 고난도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행 14:22절에서 보는 것처럼, 바울은 제자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로 가는 중에, 건강 문제로, 학업 문제로, 사업 문제로,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이런저런 일로 인하여,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며 근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야 할 목적지는 있고,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또 시작해야 하고, 또 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또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의 이름이 디오스구로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디오스구로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제우스(Zeus)레다(Leda)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폴룩스”(Pollux)를 가리키는데, 이들 쌍둥이는 또한 별자리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그리고 이 쌍둥이 형제인 디오수구로항해의 수호자로도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의 이름을 지을 때, 종종 디오스구로라고 지었는데, 바울이 탄 배도 그런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배의 앞머리 양편에는 카스트로폴룩스 쌍둥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고, 그 아래에 디오스구로라고 이름을 써 붙었을 것입니다.

 

그런 배를 타고, 바울 일행이 멜리데에서 출항하였는, 12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칠리 섬의 수라구사”(Syracuse) 항구에서 3일간 정박하였다고 합니다. 지도를 보시면 멜리데에서 북동쪽으로 약 145Km정도 떨어진 곳에 수라구사가 있는데, 이 수라구사는 B.C. 734년에 고린도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하였으나, B.C. 212년 이후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수라구사는, 상당히 번창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런 흔적을, 사진으로 보면, 고고학 공원 유적이 있습니다. 이런 유적으로 보아, 옛날에 이 지역이 상당히 발달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유체 속에 담긴 물체는, 잠긴 유체의 무게와 같은 크기의 부력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목욕탕에서 유레카”(알았다)라고 외치면서 알몸으로 뛰쳐나갔다는, 그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가 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도심 중앙에 아르키메데스의 동상을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바울은 이 수라구사에서도 그냥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몬의 본고장인 시칠리였으나, 아직 이른 봄철이었기에, 레몬 향기는 맡지 못하였을지라도, 주어진 3일 동안, 이곳저곳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보시는 것처럼 수라구사 도심에 바울 기념교회가 서 있는 것으로도 입증됩니다.

 

그렇게 3일간 수라구사에서 머물던 바울은, 재충전을 한 후, 13절 상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시 디오스구로 호를 타고 출항하여 <둘러가서> 레기온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지도로 레기온도 확인해 봅니다. 로마로 가기 위하여 수라구사에서 계속 북상하면 레기온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지역을 레기오 칼라브리아(Reggio Calabria)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디오스구로호가 이 레기온에 정박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그재그로 불어대는 바람 때문, 항해에 어려움이 있어서, 남풍이 불어주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13절 상반절을 다시 보면, 둘러가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말은, 이리저리 방황하였다는 말입니다. NIV에서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나, KJV에서는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항해의 수호신 이름을 딴 디오수구로 호도, 바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고, 그러므로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은, 만약에 남풍이 불어주지 않는다면, 하루가 아니라 며칠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13절 하반절에서 보시는 것처럼 다음 날 남풍이 불어주므로, 이튿날에 보디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든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고 지도로 보면, 바울이 도착한 보디올은, 나폴리와도 아주 가깝고, 폼페이도 가까운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디올의 현재 이름은 뽀쭈올리(Pozzuoli)입니다. 사진으로 보디올 항구를 봅니다. 그리고 다음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저 항구에도 바울 도착 기념교회가 있으며, 그리고 다음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교회 앞의 동판에는 다소의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바울 상륙을 소개해 놓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저 보디올에 도착하자 14절 상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지만, 바울 일행은 형제들의 청함을 받아 일주일을 보디올에서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교훈 하나를 받고 지나가야 합니다. 바울과 보디올 교회 성도들은, 전혀 면식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보디올 성도들은 바울 일행을 일주일 동안이나 접대를 하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런 교제가 가능합니까?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때문에, 저들은 한 형제자매로 우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우애가 넘쳐야 합니다. 그러면 30주년을 맞은 우리 열림교회는 더욱 아름답게 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보디올에서 형제들로부터 일주일 동안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여독을 말끔히 풀어내고 재충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재충전한 바울 일행은 14절 하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로마로 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배를 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도보로 로마까지 가게 되는데, 사진으로 보듯이 압비아 가도”(Via Appia: 길의 여왕이란 뜻)라는 길이 나 있었기에, 이 길을 따라가면, 건강한 장정은 5일 정도면 로마로 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소원했던 시간이나, 환경이나 여건에서, 로마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리고 3년이 더 지나서, 로마에 도착하였으며,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로마에 입성하였지만, 그 시간은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춘 것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좀 더 빨리, 좀 더 유용한 방법으로 로마로 들어오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께서는 바울이 바라는 방법대로 로마에 들어오도록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로마에 입성케 하렸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기도한 것,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는 하나,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더 놀랍게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과정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타임이 언제인가잘 체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합니다. 또 섬기라면 또 섬겨야 합니다. 다시 엎으리라면 또 엎드려야 합니다. 또 놓아버리라고 하면 다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손을 잡으라고 하면 손을 잡아야 합니다. 또 타라고 하면 또 타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하고 또 원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막혔습니다. 그리고 길이 열렸으나,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로마에 도착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그러므로 앞으로의 삶도 <또 타야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면서, 그 결과를 놓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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