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상25장23-31 아비가일이 주는 도전(25.05.25)
- 김태규 2025.5.25 조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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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5장23-31 아비가일이 주는 도전 1, 212(347), 328(374)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가정이 잘되려면, 남편이 훌륭해야 하느냐, 아니면 아내가 훌륭해야 하느냐고 따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문제로 따지는 데는 정답이 없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훌륭해야 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훌륭해야 합니다.
교회가 아름답게 부흥하려면, 여성도들이 잘해야 하느냐? 남자 성도들이 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는 여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영역이 있고, 남자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각각의 몫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자기 몫에 태워진 부분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정이 행복하고, 그렇게 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남편보다 아내가 더 훌륭하였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남편의 잘못으로 가문이 파멸할 위기에 놓였을 때, 아내가 기치를 발휘하여, 파멸 직전의 가문을 지켰으며, 분을 참지 못해 사람을 마구 죽임으로, 신정 왕국의 차기 왕으로서 치명적 오점을 남길 수 있었던 다윗의 발걸음을 막았던 여인의 이야기인데, 이 여주인공의 이름은 아비가일입니다. 참으로 현명한 여인이었고, 헌신적인 여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열림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아비가일 같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 회원들 여러분들께서는, 모두가 제2의 아비가일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이제 본문 말씀을 같이 살피기를 원합니다.
본문 말씀은 약 3,000년 전의 사건을 다룹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장차 왕이 될 다윗이 있었고, 갈멜 근처의 “마온”이라는 곳에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갈멜에서 목축업을 하는 사람으로,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삼상 25:2절 말씀을 보면, 양이 3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여러 형편을 고려한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품은 모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3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그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였다>고 합니다. 여기 <완고하다>라는 말은, 난폭하고 거칠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는 <목이 곧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발은 능동적으로 악한 행위를 일삼은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 25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아내도 그를 평하기를 “불량하다”고 하였고, 또 “미련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발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리석다”, “미련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나발은, 이름 그대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었다고, 아내마저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그는 불량하여,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지도 않았기에, 하인들도 그와 대화하기를 싫어했습니다. 나발은 재산은 많았으나, 참으로 인간답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36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냥 먹고 즐기는 향락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달랐습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여기 용모가 아름다웠다는 말은, 외적으로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내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여인이, 불량하고 난폭한 나발과 부부로 살고 있었기에, 아마도 속 터지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왜 이런 나발하고 부부의 연을 맺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친정 부모의 실수인지, 아니면 아비가일이 잠시 눈이 삐었든지, 아니면 결혼 전에는 안 그러던 나발이, 결혼 후에 변하였든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비가일은, 불량한 나발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비가엘에게는 <물질적인 고통>은 없었겠지만, <정신적이 고뇌>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나발과 아비가일의 집에,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동지 600명과 함께 갈멜에서 도피생활하고 있었기에, 몹시도 굶주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보는 것처럼, 나발이 갈멜에서 자기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당시 양을 치던 주인이 양털을 깎는 날이면, 많은 식물을 준비하여 잔치를 하면서 양털을 깎았습니다. 그러므로 양털 깎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가서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윗도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사람들을 나발에게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갈멜에 머물면서 나발의 가축을 손대지 않고, 7절에서 보는 것처럼 오히려 목자들을 도와 가축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으로 보면, 다윗은 나발에게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8절에서 보는 것처럼 <은혜를 입혀달라>고 정중히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0절에서 보는 것처럼 나발은 다윗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면서 덧붙이기를,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사울 왕을 배반한 불충한 건달>이라고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보는 것처럼, 떡과 물과 고기를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런 소식을 들은 다윗은, 너무너무 분하고 섭섭해서 13절에서 보는 것처럼 400명을 무장시켜서 나발에게로 갔습니다. 22절 말씀을 참고할 때, 다윗은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자, 14절에서 보는 것처럼,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한 하인이,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술에 취해있는 나발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해보았자 소용없을 일이었기에, 아비가일에게 이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보는 것처럼, <집안이 멸망할 상황인데, 주인은 불량하여 말이 안 통하니 어쩌면 좋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이런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통 여인들 같으면 새파랗게 질려서, <아이고 내 팔자야...> 라고 하면서, 남편을 원망하거나 욕하면서 낙심하고 좌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침착하게 움직였습니다. 따라서 18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남편에게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기에, 일단 급히 식물을 준비하여, 다윗에게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도중에서 다윗과 무장한 그의 군대를 만나자, 아비가일은 23절에서 보는 것처럼,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아비가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에, 오늘 우리는 이것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1. 24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비가일은 남편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고, 다윗 앞에 엎드려서 이 모든 잘못이, 남편의 책임이라고 하지 않고, "이 죄악을 나 곧 내게 돌리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25절에서는, <나발은 미련하여 그런 짓을 하였으나, 자신은 다윗이 보낸 소년을 보지 못하였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그것은 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부잣집 안주인이었기에, 당당하게 다윗을 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총명한 귀부인이었던 그녀는, <도피하여 사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다윗>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남편의 허물을 <몽땅 짊어지려는 모습>을 취하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며, 진정한 헌신자의 모습 아닙니까?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 어떤 영상을 하나 보았는데, 어떤 남성이 술에 취해서 눈 덮인 길을 가다가 넘어지자, 주먹으로 막 땅을 치면서 하는 말이, <너 때문이야>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는데, 자신이 넘어진 이유가, 눈 덮인 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만 그럴까요? 많은 경우, 사람들은 문제가 <자기 탓이 아니고, 상대방의 탓>이라고 합니다. 내가 늦은 이유는 <당신이 너무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지각한 것은 <엄마가 깨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때면,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선악과를 먹은 후, 여호와께서 문책하시자, 아담은 하와 때문이라고 하고,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나 때문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아비가일은 다릅니다. 남편의 잘못을 자기가 책임집니다. 따라서 바라기는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들이, 바로 아비가일 같은 분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아비가일과 같은 그런 자세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탓입니다> 라고 하면서 산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2. 아비가일의 두 번째 아름다운 면은, 격분한 다윗의 마음을 가라앉힌 것입니다.
25절을 다시 보시면, 아비가일은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정중하게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뭡니까? 단순히 남편의 목숨을 위기에서 건지려고 한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나발의 집 모든 남자를 죽이려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던 다윗에게, “나발을 개의치 말라”고 간청한 건, <나발이야 죽어 마땅하지만, 불량한 사람 나발을 죽인다면, 당신은 사람의 피를 흘린 죄를 범하는 것이니>, <그리 마옵소서>라는 것이며, 지금 나발과 그 집안사람들을 죽인다면, 그 일 때문에 나중에 후회하고 슬퍼하게 될 것이니, <그리 마옵소서...> 라고 하면서, 다윗의 격분한 맘을 가라앉힌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33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실까요?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예, 아비가일은, 격분한 다윗의 앞길을 막아서서, 피 흘리는 죄와 복수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고 몸을 던져 막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아비가일이 다윗의 분을 가라앉히지 않아서, 다윗이 격분을 참지 못하고 성난 대로 칼을 휘두르며 많은 사람을 죽였다면, 이 일은 다윗이 왕국을 건설하는데 커다란 결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직 나라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다윗이, ‘분을 내어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그런 사람이 무슨 왕이 될 수 있겠느냐’>고 욕을 얻어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습니다.
잠 14:1절에서는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헐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여인이었기에, 칼을 뽑아 든 400명을 거느리고, 배은망덕한 나발 일족을 멸하려는 다윗의 격분한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 회원들 여러분들은, 이런 아비가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가정에서도, 교회에도 분통터지는 일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덩달아서 부채질을 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를 북돋울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그 분노를 잠재울 줄 알아야 합니다. “섭섭해도 참으세요, 괘씸해도 맘 가라앉히세요.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겁니다”라고 하면서, 분노를 가라앉히게 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비가일의 자세입니다.
3.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필요를 공급하는 아비가일의 아름다운 모습에 관한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러 가면서 그냥 빈손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나발을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아비가일은 다윗이 요구한 것을 준비하여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그래서 27절에서 보시는 것처럼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라고 했는데, 아비가일이 드린 예물은 18절에서 보는 것처럼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이렇게 많은 예물을 가지고 다윗을 맞음으로 자기 집안에 속한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아비가일이 준비한 것은 자기 집에서 필요하여 준비해 놓은 물질이지만, 집안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는 그것을 아낌없이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말로만 은총을 구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함께 준비하여 헌신함으로, 가정을 위기에서 건질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향락을 위해 물질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교만했고 건방졌습니다. 물질 때문에 배은망덕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물질로 헌신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는, 그 가정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 그 국가를 이루고 있는 백성이 어떻게 사느냐에 좌우됩니다. 오늘 성경은 나발 같은 사람은 그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비가일 같은 사람은 그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아비가일 같은 분들로 사셔서 공동체를 이름답게 세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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