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하19장 16-23 스루야의 아들들(25.08.03)
- 김태규 2025.8.3 조회 17
-
삼하19장 16-23 스루야의 아들들 28 312(341) 460(515)
오늘 본문에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우선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벗은 발로 도피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충신들의 도움으로 난을 잘 극복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시므이와 시바입니다. 16절에서 보는 것처럼, 바후림에서 살던 베냐민 사람 시므이는, 다윗이 환궁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17절 상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므이가 다윗을 마중 나오면서, 베냐민 사람 1,000명을 거느리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에서 상당한 세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다윗이 도피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장났다고 생각하고는, 아주 심하게 저주를 퍼부었는데, 다윗이 멀쩡하게 돌아온다고 하니, 너무 놀라서, 얼른 다윗을 만나 용서를 빌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17절 하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바도 그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을 거느리고, 다윗 왕에게로 나아왔다고 합니다. 시바도 다윗 왕이 도피하자, 다윗 왕이 주인으로 섬기라고 하였던 므비보셋을 모함하고, 그의 재산을 착복하였기에, 벌을 면해보려고 다윗 왕에게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윗 왕에게 나올 때, 18절에서 보는 것처럼, 왕의 가족들이 안전하게 요단강을 건너도록 하려고, 나룻배도 준비되었다고 하는데, 이 나룻배는 시므이와 시바가 왕의 환심을 사려고 준비하여 가지고 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다윗 왕이 요단강을 건너오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가서, 요단 동편에 있는 다윗 왕을 맞았으며, 시므이는 왕 앞에 엎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보는 것처럼,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이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20절에서는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무조건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잘하는 것이지요. 죄인은, 구할 것은 용서밖에 없는 것이기에, 시므이는 용서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므이가 감정적으로 살았던 점과 시바가 물욕에 눈이 어두웠던 점은 본받지 말아야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자세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아비새입니다. 21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비새는 다윗에게 말하기를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를 당장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비새가 이처럼 시므이에게 분노하면서, 그를 죽이자고 한 이유는,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피할 때, 다윗 왕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며,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라고 저주하였기에, 이런 사실을 아는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비새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 22:28절에서 보는 것처럼,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비새의 말에 감정적으로는 동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피난의 여정을 마치고 환궁하는 시점에서, 베냐민 지파의 유력자 시므이를 처형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함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본문 22절에서 보는 것처럼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라고 하면서 아비새를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참고로 <너희가 나의 원수가 되다>라는 말에서 <원수>라는 말은, <사탄>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아비새는 <사탄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다윗이 아비새를 꾸중하면서, <아비새야>라고 하지 않고,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스루야의 아들들>이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 제목은 <스루야의 아들들>로 정하였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윗의 가계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위에는 7명의 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새는 8명의 아들을 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새에게는 두 딸도 있었는데, 하나는 스루야로, 다윗에게는 누나였으며, 다른 하나는 아비가일인데, 아비가일은 다윗의 누나였는지 동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누나였던 스루야에게는 <요압, 아비새, 아사헬>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가계를 소개할 때는, 부친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그 자녀들이 누구인가를 소개하기에, <요압, 아비새, 아사헬>이 소개될 때는, 아버지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본문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은 없고, 대신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스루야의 아들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이 밝히지 않기에, 추론해 본다면, ① 스루야가 남편보다 훨씬 유명해서였든지, ② 아니면 일찍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루야의 아들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도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는 시기에는, 그들도 다윗의 친척이기에, 피신하는 신세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아둘람에서,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과 함께 세를 구축할 때, 삼상 22:3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윗은, <나의 부모도 함께 있게 해달라>고 함으로써, 부모와 함께 스루야와 그의 아들들도 다윗에게로 왔을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다윗과 함께 있으면서, 다윗을 도와 다윗 왕국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며, 이스라엘의 건국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활약한 다윗의 충복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런 그들을 부를 때마다, 개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스루야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스루야의 세 아들 중에서, 아사헬은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에 의해 일찍 살해되었고, 요압과 아비새는 계속 다윗을 위하여 충성하였습니다. 특히 요압의 활동은 두드러졌는데, 삼하 5:25절에서 보는 것처럼,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다윗을 도와, 이스라엘을 줄기차게 괴롭혀 왔던 블레셋을 정복했습니다. 또한 대상 18:2절에서 보는 것처럼, 요압은 다윗을 도와 모압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대상 18:6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다윗이 아람을 정복할 때 함께한 자였습니다. 대상 20:1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랍바를 쳐서 함락시켰으며, 삼하 11:1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다윗을 도와 암몬을 정복했습니다.
이처럼 요압은, 일평생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는 용사였습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이스라엘을 굳건한 반석에 세우고자, 결의에 찬 행보를 쉬지 않았던,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으며, 수행 능력이 그 어떤 장군보다 탁월한 자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압과 아비새는 정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압의 경우를 보면, 삼하 24:3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윗 왕이 교만한 마음으로 인구조사를 명하자,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라고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정의로움이 있었습니다.
아비새의 경우를 보면, 삼하 16:9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갈 때, 사울 왕가의 친족인 시므이가 티끌을 날리고 돌을 던지면 저주를 할 때, 아비새는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할 정도로, 정의롭고 용기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악신이 들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자신의 군대 삼천을 거느리고 쫓아다니는 중에, 십 황무지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삼상 26:8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윗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으니 내가 창으로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비새는 정의에 용감했던 자였습니다.
아사헬의 경우를 보면, 삼하 2:18절에서 보는 것처럼, 발이 빠르기가 들노루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하 23:24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30인 용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윗의 원수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아브넬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장수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한 자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스루야의 세 아들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충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스루야의 아들들은 한결같이 다윗 왕가의 호신장군으로 충성했고, 아비새는 세 아들들 중에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창으로 삼백 명의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한 혈통의 삼 형제들이, 개인적으로는 외삼촌과 생질 사이였다고 하지만, 이 같은 충성은, 역대 지략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다윗 왕의 경호와, 왕조의 번영을 위하여 혼신을 다한 것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부정적인 면도 많았습니다. 요압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하여 잔인해졌습니다. 그는 다윗 왕조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야망과 사사로운 감정으로 군대장관의 일을 해내고 있었지, 긍휼한 마음이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 왕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죽인 무례한 자가 되었습니다. 삼하 18:5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윗은 난을 일으킨 압살롬과 싸움을 시작할 때,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기를,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삼하 18:15절에서 보는 것처럼, 요압은 상수리 나무에 걸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하여 애통하자, 요압은 국가의 반역자요, 가문의 반역자인 불효자가 죽었다고 해서, 백성들 앞에서 너무 울면 안 되고, 공과 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삼하 19:7절에 보는 것처럼, 계속 그러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 것이요, 그리하면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할 것이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압은 다윗이 아끼려고 하였던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도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삼하 3:27절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의 창에 찔려 죽은 데 대한 복수를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그럴 수 있겠으나, 이는 왕이 원하지 않은 일을, 자기 감정대로 행한 잘못이었습니다.
그런 요압은, 결국에는 왕상 1:7절에 보는 것처럼, 솔로몬을 반역하려는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솔로몬을 왕으로 추대하고는, 솔로몬에게 이르기를, 왕상 2:5절에서 보는 것처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즉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다>고 하면서, 6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왕상 2:25절에서 보는 것처럼 브나야에게 명하여, 아도니야를 죽였고, 왕상 2:34절에 보는 것처럼, 요압도 브나야의 손에 처단되었습니다. 이것이 스루야의 아들들의 종말이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는 오늘 <스루야의 아들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드리면서, 먼저는 다윗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피하였으나, 얼마 후에 난을 진압하고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하였습니다. 회복의 은혜를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늘 회복의 은혜가 있었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저는 시므이와 시바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므이는 악한 감정으로 다윗에게 죄를 지었고, 시바는 물욕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하자,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다윗에게로 나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죄를 지은 자가 구할 것은 용서 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늘 연약하고 실수 많은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서 은혜를 입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스루야의 아들들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은 다윗에게 충성한 자들이었으며,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날이 가면서 사탄 노릇을 하였으며, 요압의 경우는 말년에는 모반자와 짝하였다가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교만과 오만의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다윗처럼 회복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하셨다면, 시므이와 시바처럼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시고 계시다면, 스루야의 아들들처럼 사탄 노릇하는 결과로 빠지지 않도록, 요압처럼 반역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삶을 경계하며, 더욱 겸손히 주를 섬기십시오.
참된 충성은, 일을 많이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고집을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내 뜻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익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대로 살아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