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16장 19-26/ 기도하며 찬송하는 삶(25.08.31)
- 김태규 2025.8.31 조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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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6장 19-26/ 기도하며 찬송하는 삶 1 370(455) 369(487)
시 73편을 펼쳐 읽다보면,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보실까요?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봅니다. 먼저는 그가 참으로 경건히 살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건하고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흔하지 않은데, 아삽은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더라도 나는 믿음으로 살리라. 나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리라”라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던 아삽도, 13절 끝부분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산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4절에서 보는 것처럼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면, 아삽은 경건하 살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삶이 너무 힘들고 지치니까, 마음은 심란해지고 막 헷갈려서,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 “하나님이 계시기나 하시는 건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어찌 이럴 수가 있으신가?”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73:2절에서 보는 것처럼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아삽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경건하고, 깨끗하게 살려는 마음으로, 몸부림을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펼친 분문 말씀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일로 인해 고소를 당하고, 23절에서 보는 것처럼 매를 많이 맞은 후, 감옥에 갇히고, 24절에서 보는 것처럼 차꼬에 차이는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나, 그들은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미끄러져 내려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며 찬송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바울이 갇혔던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옛날의 감옥은 습하고, 춥고, 악취가 코를 찌르고, 병균이 우글거리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면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에 오히려 박수받아야 하는 데도 말입니다.
어디 그것 뿐입니까? 차꼬까지 차였다고 합니다. 차꼬란, 발에다 채우는 족쇄를 말하는데, 당시의 차꼬는 큰 널빤지에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는 거기에 족쇄를 채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무참히 매를 맞은 후에 감옥에 갇혀, 차꼬까지 찾으니,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극에 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런 고통 중에서도, 신음소리 대신에 기도가 나왔고, 원망과 불평 대신에 찬양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찬송은, 25절에서 보는 것처럼 “죄수들이 듣더라”라는 표현으로 보아, 밤의 적막을 깨뜨릴 만큼 당당하고 우렁찼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과 실라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저들도 아프면 신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힘들면 낙심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들이 죄를 지어 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일을 하고도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무고히 매를 맞고, 습하고 냉한 감옥에 갇혀, 차꼬까지 채였습니다. 그런데도 신음 대신에 찬송이, 한숨과 원망 대신에 기도가 나왔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럴 수 있었을까요? 우리 좀 배워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기도하고 찬송했을지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들이 부른 찬송과 그들이 드린 기도 내용이,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와 찬송은 아마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 불렀던 그런 내용과 흡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가 기도하며 부른 찬송이 어떤 것이었나를 보면, 바울과 실라가 부른 찬송과 기도가 어떤 것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인데, 옛 순교자들은 한결같이 “오 주여! 나에게 이와 같은 영광을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고난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교부 ‘익나티우스’의 순교 장면을 잠깐 함께 나누어봅니다. 저는 그분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글로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익나티우스가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로마 원형 경기장 안으로 끌려갑니다. 흰옷을 입은 크리스천들은 그 현장을 보면서, 끌려가는 익나티우스를 위해 눈물로 생명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마지막 고별송을 부른 것이지요.
그때 익나티우스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내가 다시 놓이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저 사자에게 찢겨 밥이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 달라”라고요. 그러면서 전송의 손을 흔들며 최후의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나 익나티우스는 이제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시작한다”라고요. 이 한마디는, 참으로 뜨거운 기도며, 참으로 뜨거운 찬양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의 내용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습하고, 악취나는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신음 대신에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그들은, 매 맞은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해 달라고, 쇠사슬에 매인 것이 빌립보 복음화를 위한 계기가 되게 해 달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저에게는 부끄러운 마음이 몰려왔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고, 그들이 믿은 예수님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신데, 그들은 기쁘나 즐거우나, 힘들고 어려우나, 한결같이 기도하며 찬송하고 살았는데,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하는 자책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는 바울과 실라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도하고 찬송하는 삶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은, 바울과 실라가 살던 그런 삶의 현장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들의 삶의 처지에 비하면, 우리는 천국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하고도 매를 맞은 후, 습하고, 냉하며, 악취나고 지저분한 감옥에 갇혀, 차꼬까지 차인 상황에서도, 기도하며 찬송하였는데, 우리는 얼마나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까?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고민하면서 살고, 어디에서 밥을 먹을까 고민할 때가 있고, 좋은 신발을 신고, 무공해 식품을 찾으며, 이런저런 운동과 여가를 선용하면서도, 기도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불편하냐>고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사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다가 마귀의 농간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습니까?
삶이란 평안할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에도 기도하고 찬송해야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도 기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그래야 초지일관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변덕스럽게 사는 것을 좋게 보시지 않습니다. 초지일관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26절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기적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우시다면, 낙심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이 찬송을 즐겨 부르시기 바랍니다. 370장입니다. 2절만 함께 보십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저는 이 찬송이 너무 좋습니다. 두려움이 없을 수 없지만, 두려움이 몰려올 때, 그 두려움을 기도 제목으로 삼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숨 쉴 일이 있을 때는, 한숨만 푹푹 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전드립니다. 두렵고 한숨 쉴 일을 만날 때에는, <주님, 내 앞길 멀고 험해도 주님만 따라가겠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힘 주세요. 이기게 해주세요.> 라고 간구하면서,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힘주시고, 도우시고, 승리케 하시면, 그것이 기적 아닙니까?
물론 힘들고 어려울 때,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도하고 찬송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여러분들과 함께 살피면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에서도, 낙심하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발은 차꼬에 차였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주님 계신 하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땅에서 얽어 매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를, 엡 2:6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우리를 부활시키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땅에서 살고 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안 사람이었습니다. 실라 또한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비록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차꼬에 채인 신세로 고통을 당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하늘에 앉아 있기에, 그들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교부 터툴리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마음이 하늘에 가 있을 때에는 발이 차꼬에 매여 있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요.
그러므로 도전을 드립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존재임이 분명하지만, 마음은 하늘에 두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하늘에 함께 앉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에게 한 번 여쭈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날마다 어디로 향하고 계십니까?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에 여러분들의 마음도 함께 머문다면, 이제는 그 마음을 위로 향하도록 마음의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골 3:1-2절에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이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하늘로 향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감당하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도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일보 주필로 근무했고, 후에 사장까지 지내신 장명수 씨의 칼럼 하나가 생각이 나서 소개합니다. 제목은 “새와 주부”입니다. 내용인즉, 일본에서는 6월 셋째 주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지키는데, 이날을 맞아 직장남성 2천여 명을 상대로 “내세에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라고 설문조사를 했더니, 첫째 답이 새였고, 다음의 답이 주부였다고 합니다.
주부가 되고 싶다는 것은, 세끼 밥을 공짜로 먹으면서 낮잠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장명수 씨는 “새가 되고 싶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주부가 되어 편히 살고 싶다는 것은 오늘날의 물정을 잘 모르는 남정네들의 생각”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남성들이 왜 새를 부러워할까요? 그것은 망망대해를 굽어보며 푸른 하늘을 힘차게 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가 아닙니다. 새가 될 수도 없습니다. 어쩌지요? 그러나 우리는, 새처럼 하늘을 향하여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 비결은, 우리 마음에 믿음의 날개를 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믿음의 날개가 달릴 때, 우리는 독수리같이 창공을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새보다도 높이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새들은 아무리 높이 날아도, 하늘 보좌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이지만,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 보좌에까지 이르러, 주님을 뵙는 신비한 역사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땅에 있는 보화만 찾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날개를 달고, 주님 계신 보좌를 향해 꿈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바울같이 실라같이, 고통 중에도 신음 대신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을 것이고, 인생의 밤중에도 기도하며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기쁘고 즐겁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힘들고 어렵기도 합니다. 따라서 모든 일들이 내 믿음대로 될 때도 기도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아야겠지만, 주님 뜻대로 될 때도, 우리는 기도하며 찬송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높은 곳에 두시기 바랍니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둔 사람은, 온갖 것을 누려도 기도하고 찬송하기보다는 불편한 것에 마음 쓰며, 불평하고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높은 데 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높은 데 두시고, 그 마음에 믿음의 날개를 다십시오. 그리고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주님 계시는 곳을 향하여 열심히 날개짓을 하십시오. 그러면서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그럴 때 주님께서는, 형편과 처지를 따라 도우시고 때로는 기적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지진을, 때로는 사슬이 풀리는 역사를, 때로는 옥문이 열리는 현대판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고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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