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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9장10-17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24.02.18)
김태규 2024-02-18 추천 0 댓글 0 조회 110
910-17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1 463(518) 380(424)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삼으시는 중에,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즉시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런 사실은, 결단이라는 것은 속히 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어떤 결단은 고민하면서 신중히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결단은 신속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 삼으시자,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너무 감사한 나머지, 10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였는데, 바리새인들이 이런 일을 보고는 11절에서 보는 것처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라고 비난을 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비난은, 어떤 면에서는 타당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세리로서, 동족들의 돈을 착취하던 경멸받는 자였기 때문에, 이런 자를 제자로 부른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난에 대해 12절에서 보는 것처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라고 하셨고, 13절에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고 왔기에, 세리 마태를 불러 제자를 삼는 것도 문제없고, 그리고 마태가 초청한 자리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도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을 봅니까? 어리석은 질문은, 늘 부끄러움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편견을 가지고, 오해와 비판적인 마음으로, 어리석은 질문을 하면서 살 것이 아니라, 더욱 진리에 굳게 서서, 지혜로운 말을 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이번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나서서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 절기에 유대 전통을 따르지 않고, 세리 마태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기에, 왜 그러느냐고 따지고 든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따짐은 이유는 있습니다. 16:29절을 보면,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라고 합니다. 710일에 속죄 절기를 지키면서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욜 1:14절에서도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금식하면서 육체의 탐심을 죽이고, 죄를 회개하여 새롭게 변화된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거국적인 금식일인 속죄일에도 금식하였으며, 때로는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제자들에게 이러한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을 해야 하는 시기인데도 금식을 하기보다는, 세리 마태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보는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왜 저러는 것일까?>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들의 스승이요,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붙잡혔는데도,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며 금식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있었기에,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어찌하여 금식하지 않느냐?> 질문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섭리의 다양성과 개인의 다양한 신앙 표현을 인정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우리와 바리새인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의 다양성을 모르는 저들의 따짐에는, 자신들만의 종교적 독선과 편견이 꽉 차 있습니다. 왜 당신들은 우리와 같지 않느냐?, 왜 당신들은 우리가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지 않느냐? 라는 독선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는 옳고 당신들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잘못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면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가 옳고, 내 방법이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다른 것은 인정하지 못하고, 다 틀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를 따라 아름답게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찬송을 하고 싶은데, <너는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싶은데, 찬송하자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섭리하시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지상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구태 의연하고 경직된 종교 제도의 굴레에 매여, <왜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특별히 금식기간인데...>라고 하면서, 은근히 자신들의 경건함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잘못을 고치기 위하여, 3가지의 예화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첫 번째 가르침은 혼인집 잔치 이야기로 시작 됩니다. 따라서 본문 15절 상반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금식하면서 슬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인집에서 즐기는 것처럼 즐기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리 마태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기뻐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금식하는 규례를 깬 문제>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그래도 괜찮은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금식 기간일지라도, 혼인식이 있는 경우에는 금식을 한 것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이런 분별력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죄인이 돌아왔기에, 이것은 마치 혼인집 잔치처럼 기뻐할 일이기에, 그렇게 하고 있는데, 금식하지 않는다고 편견을 가지고, 오해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때와 장소와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바르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상황윤리를 따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가장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는 전통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금식할 때와 그러지를 않을 때를 분간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 분별력의 문제이며, 지혜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15절 하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라고 하십니다. , 분명히 금식할 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표현입니다만, 다른 측면에서는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환난의 날, 고통의 날을 의미하며, 그런 날에는 금식하며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주님을 따르다 보면, 때로는 <혼인집에서의 기쁨>과 같은 것도 누릴 수 있으나, 때로는 <핍박도 당하고 큰 손해>도 당하기도 하고, 또 이런저런 문제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쁘고 즐거울 때는, 즐거워하고 찬송해야 하지만, 어려움이 오고, 환난이 오고, 연단이 올 때는 금식하며, 애통하며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인이 돌아왔기에, 신랑과 함께 하는 혼인집처럼 기뻐할 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물론, 세례 요한의 제자들마저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편견과 아집으로 오해하고 비판을 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제발 그러지 말고,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6절에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은, 아직 줄어들지 아니한 새 옷감을 헌 옷감에 대어 기워놓으면 당장에는 쓸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옷을 물로 세탁할 경우에 새 옷감이 줄어들면서 헌 옷감을 잡아당겨 옷에 주름이 지거나 찢어져서 옷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므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시는 이유는, <새 것과 헌 것><예수님의 복음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사고>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도,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도 <헌 것>, 즉 그들의 <율법과 종교적 위선>에 사로잡혀,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열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죄인의 집에서 먹고 마시는 이유를 모르고, 편견과 오해로 비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저들은 복음의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오해를 하였구나. 우리가 너무 율법주의적인 사고와 전통을 고수한 나머지,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고, 남을 함부로 비판하였구나, 이제는 복음으로 옷 입어야겠구나...> 라고 깨닫는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에게는 깨달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한 번 더 예화로 말씀을 하셨는데, 17절에서는 보는 것처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하는 이유는, 발효가 되지 않은 새 포도주는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차츰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더 큰 부피로 팽창하게 되므로,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낡은 가죽 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되기에,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예화로 가르치시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로, 유대교의 고루한 사상을 낡은 가죽 부대로 비유하시면서, 유대교의 고루한 사상으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새 포도주, 즉 복음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여기서 말하는 새 가죽부대란 새 포도주인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변화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과거의 형식과 사고에 집착하지 말고, 새 가죽부대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우리 자신도 낡은 신앙 관습과 아집을 고수하는 옛 가죽부대로 있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 포도주인 복음>을 수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나는 늘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는가? 나에게는 늘 새로운 은혜가 임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예수 믿는 기쁨이 있는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게는 불타는 믿음이 생기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는 기뻐할 때와 금식하며 기도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낡은 관습과 아집에 얽매여서, 마치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변화되지 못한 심령으로 인한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자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주의적인 시고와 전통과 낡은 관습과 자기 주장과 고집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지를 않고서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 딴 소리를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자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합니다. 변화되어야 할 자라고 합니다. 그래야 새 포도주를 공급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새 가죽부대가 됩시다. 변화는 어려운 것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봄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잖아 세상이 놀랍게 변화된 현장을 볼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도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변화되는 비결을 소개해 드립니다. 고후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이 진리를 붙들고 사시면서, 변화되어, 더 많은 죄인들을 불러 교제의 장을 만들고, 복음으로 비유된 새 포도주를 더욱 많이 공급 받으시면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더 즐거움을 누리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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