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전문

  • 설교 동영상 >
  • 주일설교 전문
눅24장13-27 뜨거운 마음, 감격하는 삶(24.03.31)
김태규 2024-03-31 추천 0 댓글 0 조회 71
2413-27 뜨거운 마음, 감격하는 삶 161(159) 167(157) 171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리는 부활주일입니다. 11:25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비록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보증이 되셨기에, 우리는 죽어도 살 것이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아, 부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보면,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은 많고 믿음으로 들어오는 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 이런 비극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왜 복음을 제시하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냉소적일까요?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 사람들이, 마치 데마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살다가, 데살로니가로 가버린 것처럼 살아갈까요?

 

그 이유는, 마음에 감동이 없고, 뜨거움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화에 물들어가면서, 믿음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또는 이런 저런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늘 마음이 감동되고, 마음에 뜨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믿음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까지는 믿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이 깨달아지고, 마음에 감동이 오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사람은, 믿음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주일인 오늘은, 우리가 함께 펼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뜨거운 마음, 감격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같이 나누면서 피차 은혜를 받고, 우리 모두가 뜨거운 마음, 감격하는 삶 자리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실의에 빠졌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시작됩니다. 여기 소개되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18절에서 보는 것처럼 글로바라고 밝히지만, 이 글로바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습니다만,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으로 보아,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처형 사건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22-24을 볼까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도 들었던 사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고 합니까? 17절 말씀을 보면, 저들이 길을 가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예수님께 나타나셔서, 너희가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라고 물으시자,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고 합니다. 심령이 편치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무엇을 이야기 하다가 슬픈 빛을 띠었습니까? 19절에서 보면 저들은 나사렛 예수의 일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보여주며, 2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을 보여줍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본 사람들이었기에, 길을 가면서 14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누면서, 몹시 상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일로 허탈감과 상실감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21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속량할 것> 이라고 기대했는데, 그 기대감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 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실 것을 믿었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는 새롭게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 기대감은,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때가 오면, 누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경쟁심을 가지면서, 9:46절에서 보는 것처럼 길을 가면서도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두 제자들에게도 이런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심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저들이 믿었던 메시야는, 나라를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동족에 의해 처형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오면서,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들이 그 절망감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일상생활에서,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느끼는 <절망감>이 있다면, 반드시 반전시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절망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이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가다가 마음을 반전시킬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15절에 있습니다. 보실까요?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인생을 더욱 감격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절망의 자리에 계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이 부활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새 힘과 용기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셨듯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님께서 찾아와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찾아와 주시는 은혜>를 입혀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은혜>를 입었습니까? 17절을 다시 보면, 저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도 도전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마치 절망한 두 제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냥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성경을 뒤적이며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말씀을 묵상하며 붙들고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믿음도 없습니다. 절망한 모습이 역력합니다. 16절에서 보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곁에 계시면서 대화를 하시는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영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25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그들이 <그런 사람들> 일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주님께서 찾아오셨고, 또 말씀도 들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비록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였으나, 결국에는 말씀을 믿게 되었고, 32절에서 보는 것처럼 마음이 뜨겁게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마음에 뜨거움이 생기면, 삶에는 감격이 있고, 열정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마음에 뜨거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기가 싫습니다. 무기력해 집니다. 무기력한 삶은 아무 것도 쟁취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돈, 지식,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뜨거운 마음을 가지느냐,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열정 없이 성취된 위대한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마음도 뜨겁지 못하고, 감격도 없고, 열정도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냉소주의와 적당주의와 편의주의에 빠져, 모든 것을 대충하고, 적당히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런다고 합니다. 주어진 일만하면 되지, 뭐 더 하려고 해...” 그러나 그렇게 편의를 도모하면서 살다보면, 게으름과 나태 속에 빠지기 쉽고, 그렇게 살다보면, 삶에 보람도 느끼지 못하고, 인정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도 감당치 못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이런다고 합니다. 뭐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일할 필요가 있어?” 또 어떤 분들은 걔 꼴 보기 싫어 나 일 안하는 거야...” 그러나 우리는 호들갑 뜨는 사람들이 아니고, 사람 좋으라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감격하며 살면서, 매사에 열정을 내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도 계 3:19절 말씀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열심히 믿어야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찬송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도 열심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회개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그래서 감격하는 것, 그래서 열심을 내는 것은, 아무렇게나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을 뜨겁게 하려면 불을 지펴야합니다. 차 안을 따뜻하게 하려면 히터를 틀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려면 우선은 주님을 만나야 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직 믿어지지는 않지만, 듣고, 두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그것을 서로 나누는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래야 감격이 있고, 그래야 열정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두 제자를 찾아오셨던 주님께서도, 절망하여 있고, 영성도 없고, 믿음도 없고, 마음이 냉랭한 두 사람들에게, 27절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저들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33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엠마오로 가던 길을 즉시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35절에서 보는 것처럼 두 사람들은 길에서 주님을 만났던 일에 대해 간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허탈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는, 감격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도들과 함께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들어와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확신을 가진 자들의 말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큰 보람을 느끼며, 더욱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께도 이런 감격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뜨거움도, 보람도, 감격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미지근하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믿는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이 뜨겁고, 감격이 일어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생기고, 그래서 내가 전하는 복음 때문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들어오고, 그래서 나는 더욱 감격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성도의 복된 삶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자주 만나십니까? 그리고 마음에 뜨거움이 있습니까? 그래서 감격을 가지고 살면서, 이웃에게, <내가 받은 은혜>를 막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까? 너무나,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주님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요? 성경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3:20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고 계시는데도, 신속히 내 마음을 열어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니면, 내가 은혜를 받아 뜨거워진 마음을 관리하지 못하고, 얄팍한 냄비 신앙으로 살면서, 쉽게 식어버리게 한 것이 이유가 아닐까요? 아니면 말씀이 은혜가 되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만약에 이런 것들이 그 원인이라면,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낙심하고 실망하고 좌절하여 허탈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런 중에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영적인 눈이 뜨이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신앙을 회복하는 복을 받고, 감격을 가지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낙심한 자리에서라도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펼치시고 깊이 묵상하시 바랍니다.

 

아직 믿음에 들어서지 못해도 좋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와도 좋습니다. 그래도 주님에 대하여 생각하시고, 하소연을 해도, 주님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말씀도 깨달을 수 있고, 마음이 뜨거워지셔서 낙심한 자리에서 일어서서, 발걸음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주님이 계시는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내가 경험한 주님을 열정적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이런 은혜를 누렸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하며, 도전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삶에 열정이 일어나서,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눅10장 17-24 성도의 기쁨(24.04.07) 김태규 2024.04.07 0 63
다음글 눅 23장39-43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24.03.24) 김태규 2024.03.24 0 78

새로 옮긴 교회 주소: Castle Street Methodist Church, Castle Street, Cambridge CB3 0AH, - - - - - 주차장으로 들어오시려면 2 St Peter’s Street, CB3 0AH로 입력하시면 됩니다.

Copyright © Cambridge Korean Yeolim Church 케임브리지 한인 열림교회-영국 케.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40
  • Total249,509
  • rss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