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장 11-23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여러분들은 <아버지>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머리에 떠오릅니까?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5장 말씀을 함께 펼쳤는데, 이 말씀은 탕자의 비유라고도 하고,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비유를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함께 살피면서, 피차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1절에서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두 아들을 가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으며, <두 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두 아들이란, 곧 전 인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생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한 혈통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 2:10절 상반절에서는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보아야 할 말씀은 시 95:4-5절입니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2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재산>, 즉 각자에게 나누어 줄 <분깃>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도 모두 아버지의 재산의 분깃으로 수혜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분깃을 나누어주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실까요? 요일 4:16절 상반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일 4:10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라고 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품에서 살아간다면,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펼친 본문 12절 상반절을 다시 보면,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둘째 아들의 요구는, 아버지를 향한 일종의 강요행위였습니다. 참으로 철없고, 몰염치한 요구였습니다. 그럼에도 12절 하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버지는 둘째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를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에 대해, 둘째는 어떠한 감사의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3절에서 보는 것처럼, “며칠 후에 그 모든 것을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그 <먼 나라>는 흑암의 권세가 주관하는 <죄악의 세상>인데, 둘째는 아버지와는 가능한 멀리 떨어져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렇게 아버지의 품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살면,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인데, 이런 둘째의 생각과 행위는, 곧 인류가 하나님의 <얼굴과 손길>을 벗어나, 방종하는 타락상의 <비극적인 장면>을 잘 반영해 줍니다.
철이 안든 자녀들이 가끔씩 엄마 아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면 더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가출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한다고 그들이 더 행복합니까? 죽도록 고생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철이 안든 이 둘째도, 아버지의 품안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자기 분깃을 요구하여, 그것을 가지고 더 행복한 삶을 살겠다고 흑암의 세계로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한 둘째는, 어떻게 살기 시작하였습니까? 13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라고 합니다. 그가 허랑방탕하였다는 말은, 전혀 구제할 방법이 없는 방탕아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벗어났으니 <자유다!> 라고 외치면서, 절제와 규모가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의 삶을 <낭비하는 삶>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낭비라는 뜻은, 마치 곡식을 까부르듯이 마구 까불어 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날려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는 그렇게 하여, 눅 15:30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가 가진 그 값진 재산 모두를 <창녀와 함께 탕진>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류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형상, 재능, 물질, 건강, 자연, 하늘, 땅, 바다 등을 오용하거나, 남용하거나, 악용하면> 그것은 곧 죄악 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귀하게 여겨야 하며, 선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탕아인 둘째는, 아버지께서 주신 분깃을 귀하게 여기기 않고, 허랑방탕하였기에, 결국은 본문 14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 없애 버렸고, 거기에다가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재앙을 만났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의 삶은 극도로 궁핍해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궁핍>은, <기반이 무너져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둘째는 다시는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허무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잘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재기 불능의 궁핍에 처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째도 15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 나라의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면서, 그 사람의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붙여 산다>는 것은 강력 본드로 강하게 달라붙도록 하는 상태를 말하기에, 이 둘째는 이제 그 방법 외에는 살 길이 없음을 알고, 거기에 생명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돼지는 불결한 동물의 표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둘째는 그렇게 하여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라도 하면서 목숨을 이어나가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범죄한 인간은 끝까지 이성주위, 무신론주의, 유물주의, 우상숭배를 고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라고 합니다. 그는 돼지를 치면서, 주인으로부터 정당한 보수와 식사를 제공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으나, 주는 자가 없었다고 하니, 그의 비참함은 익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쥐엄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사진을 통하여 봅니다. 이 멸매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carob tree의 열매인데, 8-30cm정도 되는 콩깍지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5-15개의 콩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구주 콩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열매는, 약간의 단맛을 내며 주로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었으나, 때로는 기근 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대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이 열매를 먹었을 것이라는 이유로, 세례 요한의 떡(St. John's bread)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된 이 둘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도 배울 채우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으니, 그의 삶은 비참하다 못해 죽을 처지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결국은 이런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둘째에게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17절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합니다. 죽을 지경에서 모든 것을 가지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고아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아버지는 풍족한 것을 가지신 아버지이기에, 그는 지금의 자리에서 절망하여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는 죽을 자가 아니라, 자신이 살 수 있도록 하실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에서 <소망의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여러분들께도, 하나님 아버지가 소망의 아버지로 보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소망의 아버지를 보았기에, 18절에서 보는 것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가려고 회심의 마음을 가졌는데, 어떻게 회개하려고 하였습니까?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회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절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긍휼을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절 상반절을 보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둘째가 회심을 한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회심을 행동으로 옮겨 회개하였다는 것을 잘 보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범했을 때에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한데, 이 회개는 우선 회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그리고 회심만 하고, 회개를 하지 않는다면, 그 회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째는 회심을 한 후, 그 회심을 회개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20절 하반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일단 회심의 마음으로 아버지께로 나아오는 둘째를, 아버지께서는 보았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의 아름다운 모습, <선수적 사랑>의 모습을 봅니다. 아버지는 자비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거리가 먼데도 아들을 보았습니다. 누가 오고 있네... 가 아닙니다. 아들이 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자비의 시선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거리가 먼데도 아들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는 아들을 보면서 측은히 여겼는데, 그 의미는 아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 아버지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반영해 줍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딱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절대로 측은한 마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도리어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왜 저러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이러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으면, 측은한 마음을 가집니다. 아버지는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 아들을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목을 안았다고 합니다. 자비의 팔로 목을 끌어안은 것입니다. 아마도 강렬하게 아들을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껴안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께 천천히 다가가지만,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인간에게 급히 달려 오셔서 큰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아가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입맞춤은 <의례적인 인사>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삼하 14:33을 보면, 다윗이 압살롬과의 입맞춤은, 압살롬의 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가 둘째와 입맞춤을 하였다는 것은, 탕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 22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였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한 것은, 둘째의 신분이 회복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가락지를 끼우라는 것은, 신분 회복에 대한 절대적인 보장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인 의미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타락할지라도, 아무리 대역죄인일지라도, 회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는 기뻐 받으시고, 회복시키시며, 절대적으로 그 회복된 신분을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저와 여러분들은 전에 지은 죄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아파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은 말씀을 보도록 합니다. 아버지는 둘째의 신분을 회복시키시고 보장하신 후, 23절에서 보는 것처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라고 하십니다. 잔치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잔치하는 이유를 24절에서 설명하기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살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먼 나라> 사람들이 많기에, 그들은 회심하고, 회개하고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 아닌가요? 그리고 나도 자주 주님의 품을 벗어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므로 혹시 내가 먼 나라로 가 있는 자라면, 금년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회개하며 다시 사랑의 아버지 품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먼 나라> 사람들에게도 주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는 새해에는 아버지께서 기뻐 맞아주시고, 안아 주시고, 그리스도의 세마포 흰옷으로 입혀주시고, 반지로 보증해주시고, 생명 잔치로 즐기게 해주시는 은총을 누리면서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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