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9장1-13 므비보셋이 받은 은총 28 301(460) 305(405)
1000 B.C.경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그의 장남 요나단, 차남 아비나답, 삼남 말기수아 등을 이끌고 블레셋 군사들과 길보아 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그 전투에서 사울의 세 왕자들은 모두 전사하였고, 부상을 입은 사울은 자결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은 두 정권이 생기게 되었는데, 하나는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들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울의 4번째 아들이었던 이스보셋이 왕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두 정권은 서로 대립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민심이 다윗에게로 기울었고,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하였던 군대 지휘관 아브넬도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로 돌아오자, 이스보셋을 따르던 군단장 격이었던 바아나와 레갑이 반란을 일으켜, 이스보셋을 죽이고 사울 왕가를 몰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장자였던 요나단의 5살 된 아들 <므비보셋>도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안 므비보셋의 유모는, 그를 급히 피신시켰는데, 도중에 유모는 므비보셋을 땅에 떨어뜨려, 두 발이 골절되는 사고가 생겨, 므비보셋은 비록 죽음의 위기에서는 벗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두 발을 저는 자로 살아야 하는 비운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오랜 후, 헤브론에서 7년을 통치하던 다윗은, 이스라엘을 한 나라로 통일하고,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는 선정을 베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를 원수같이 여기던 사울의 집안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신하들에게 <사울의 집안에 아직도 생존자가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2절에서 보시는 것처럼 사울 왕의 신하로 섬기던 ‘시바’라는 사람이 다윗 앞으로 불려 왔습니다. 그러자 3절에서 보시는 것처럼 다윗은, “사울의 집에 아직 남은 자가 있느냐?”라고 시바에게 물으면서,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다>고 하면서 그는 다리를 저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5절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게 하였고, 그래서 므비보셋은 다윗 왕 앞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런 일은 므비보셋이 다리를 다친 지 적어도 16년 이상이 지나서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므비보셋이 5살 때에 다리를 다쳤는데, 12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가 <어린 아들 하나를 두었다>고 하기 때문에, 그가 20세에 결혼하고, 지금 아이가 1살이라고 가정해도, 그가 다리를 다친 지 16년의 세월이 흘렀고, 24세에 결혼을 했다면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아이가 5살이라면 24년이 흐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오랜 세월 동안, 비운아 므비보셋은 어디에서 살고 있었습니까? 4절을 보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로드발’이란 히브리어 ‘로’와 ‘드발’이 합성된 명사인데, ‘로’란 부정을 의미하는 no의 뜻이고, ‘드발’은 <목장이나 목초지>를 뜻하므로, ‘로드발’이란 ‘목초지가 없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므비보셋은 <황무지와 같은 외진 들판>에서, 외롭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왕손입니다. 그러므로 왕궁에서 살아야 하는데, 왕가가 망하는 비운 때문에, 왕실에서 누릴 영화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람들도 많이 살지 않는 거친 들판에서 외롭게 살아야 했던, 그의 처량한 신세를, 우리는 선명히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런 처지에, 그의 몸까지 불구였으니, 참 안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므비보셋을 보면서,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비참해진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정이야 다르지만, 므비보셋은 엄연히 왕손이지만, 잔인한 자들의 반란 때문에 도피하여 황량한 들판에서 처량하게 살아가야 했을 뿐만 아니라, 도피 도중에 떨어져, 불구가 되었던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영원한 영적 불구자가 되어, 초라하게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과정은 다르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므비보셋과 같은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그의 <비참한 처지, 절망의 처지, 어둠의 처지요, 괴로움의 처지>에서 그의 인생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에게는 은총의 때가 찾아왔습니다. 다시 1절을 보면,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합니다. 또 3절에서도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라고 하며, 7절에서도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합니다. 무려 3번이나 은총을 베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은총을 입으면 생애가 달라집니다. 콜게이트 치약을 만든 윌리엄 콜게이트(William Colgate, 1783-1857)는 어렸을 때, 아버지는 중풍병으로, 어머니는 폐병으로 몸져누웠으므로, 말할 수 없이 가난하고 비참하였습니다.
철이 들 무렵, 콜게이트는 미국으로 건너가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선비가 없어서 기선의 짐짝 틀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들킨 콜게이트가 선장 앞에 끌려 왔으나, 너무도 딱한 콜게이트의 사정을 안 선장이 콜게이트에게 은총을 베풀어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뉴욕에 도착하자, 선장은 콜게이트를 비누 제조회사에 취직을 시켰고, 결국 그는 콜게이트 치약을 개발하여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콜게이트를 양자로 삼은 선장의 은총 때문이 아닙니까? 이처럼 은총을 입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 왕이 므비보셋에게 반드시 은총을 베풀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일시적인 흥분이나, 감정, 혹은 정치적 수작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 싶어 한 것입니다.
자기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죄 용서함을 받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요나단을 인하여 사울의 집에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정과 의리에 기초>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 인기가 높아지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요나단은 다윗을 환대하면서 자기의 생명같이 다윗을 사랑하였기에, 다윗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윗은, 므비보셋이 나아와 절하자, “므비보셋이여...” 라고 부릅니다. 이 부름은 애정의 표현이요, 인격적 교통의 확인을 주는 어구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무서워 말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선조의 모든 밭을 돌려주겠다고 하고, 또 왕자처럼 왕의 상에서 먹는 영예까지 누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그가 왕의 상에서 먹으면서 예루살렘에 살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안전과 기쁨의 상징이요, 성별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므비보셋은 ‘로드발’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살면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대 사회에는 몰락한 왕가의 후예를 처단하여 다시는 그 후예들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선조의 기업도 돌려주고,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며, 예루살렘에서 사는 영예까지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은혜를 누리는 므비보셋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 영적인 불구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하게, 거친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가야 할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저 본향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보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므비보셋이 은혜로 보장받은 삶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감격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고마워서, 보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을 보십시오. 그는 로드발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사망의 길로 가야했는데, 다윗이 베풀어준 은총을 입고 예루살렘에서 살게 됨으로, 그 마음에 감격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는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라고 합니다.
여기 ‘엎드려 절했다’는 말은, 므비보셋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다윗을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쭈어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여러분들은, 므비보셋이 보여주는 모습처럼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며 경배하십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므비보셋이 다윗을 경배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그가 절하여 가로되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왕의 상에서 같이 먹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므비보셋은 자기를 “죽은 개 같은 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우쭐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감사할 것밖에 없고, 겸손해 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므비보셋을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므비보셋보다 적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므비보셋보다 훨씬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 ‘사사오 데쯔사부로’ (Tetsusaburo Sasao, 1868-1914)는 이렇게 찬송시를 썼습니다. 301장 찬송입니다.“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몸도 맘도 연약하지만, 지금까지 새 힘 받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고향 집에 돌아갈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절하며, 감격하며 예배하는 삶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살필 것은,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큰 은혜를 입은 후, 경배하며 그를 섬기기로 약속하고는, 그의 결심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후에 계속 선정을 베풀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중에 아들 압살롬이 난을 일으키므로, 피하여 도망을 해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므비보셋도 다윗을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두 다리를 저는 처지라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을 보살피던 ‘시비’가 다윗에게 거짓말로 “므비보셋이 왕을 배반하였다”고 누명을 씌우므로, 므비보셋은 어이없게도 다윗의 역적이 되었고, 그의 재산은 모두 시바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동요하지 않고, 다윗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다윗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 발을 맵시 내지도 아니하고, 수염도 깍지 아니하고, 옷을 빨지도 아니하고 기다리다가, 환도하는 다윗을 맞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윗을 섬기기로 결심한 그 마음이 조금도 요동치 않고, 끝까지 다윗을 기다리는 의리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므비보셋의 진심을 안 다윗은, 므비보셋을 전과 같이 예우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배반당하고 배척당하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다윗을 기다리는 므비보셋의 마음을 보면서, 이는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의리’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해 가시기 전에 ‘내가 잠시 떠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올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 천사들도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행 1:11절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므비보셋의 심정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므비보셋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 그것은 곧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죄에서 구원받은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잃어졌던 인격이 회복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왕자의 직분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기업과 천국인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은총이 보장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에 대한 보은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겸손히, 감사함으로 죽도록 충성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전 드립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는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못하였다면, 이제 새로운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서 훗날 보장받은 그 예루살렘에서, 부끄러움 없이 영원히 주님을 모시고 더불어 사는 복을 누릴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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