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7:21-23절을 함께 펼쳤는데,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아무리 종교적으로 화려한 업적을 남기고, 뭇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롭고 선한 결실을 맺지 못하면, 심판 날에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과 함께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교훈하심으로써, 형식과 외식에 빠지기 쉬운 성도들에게 강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본문 말씀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교훈 받고, 도전 받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본문 21절부터 보도록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에는 3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는데, ①우선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불변의 진리가 전제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행 16:30절에서 보는 것처럼,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향하여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질문하자, 그들은 31절에서 보는 것처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 얻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행 4:12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진리를 굳게 붙잡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결단코 흔들리지도 않고, 변절 되지도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②본문 21절 말씀에서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21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말로만 믿지 말고, 행하는 믿음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롬 10:10절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며, 롬 10: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구원을 얻는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행함을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는 것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야고보 사도가 잘 알려주는데, 약 2:14절에서 보는 것처럼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함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17절에서 보는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믿음이 없다.”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 죽었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동물과 식물은 살아 있으면 더욱 값이 나가지만, 죽어도 약간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죽었다고 하여,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생선도 사장에서 팝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생선을 돈으로 사서, 요리를 해서 먹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전혀 다릅니다. 산 믿음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지만, 죽은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산을 옮기기도 하고, 소원을 성취하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도 하고, 영혼을 구원받게도 하지만, 죽은 믿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은 믿음은, 믿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 도전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있는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믿음이 <행동화>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이런 도전이 필요한 것입니까?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많아졌는데도, 그들이 믿음을 삶으로 표현해 내지 못하므로, 그 믿음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어, 자기에게도 유익이 없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없기에, 세상은 더 어두워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삶으로 표현해 내면서,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시로 경험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빛으로,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결코 쉬울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울며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으로 산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③본문 21절이 주는 세 번째 메시지를 보기 위하여 보기 위하여, 21절을 다시 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에서 주는 세 번째 메시지는, 나에게 믿음이 있고, 행하는 삶이 있어, 이런저런 역사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그 행함은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믿음과 행함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가르치시려고, 22절 말씀을 하시는데, 보실까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의 열심과 행함은 놀랍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보통의 믿음과 열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흉내 내기도 어려운 일들을, 저들은 하였다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23절을 보시면, 주님께서는, 그렇게 열심히 산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불법을 행하였다>는 말은,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쫓아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진짜와 가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먹고 있는 참기름은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라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세상에서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가짜일수록 진짜로 둔갑시키기 위해, 요란을 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한다고 합니다. 선지자의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엄청난 일인데, 가짜가 진짜처럼 가장하여, 주여, 주여, 하고 다니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며, 능력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가짜들은, “주님”이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여”라는 말의 의미는, “나의 주인이시여”라는 뜻 아닙니까?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한다면, 나는 그분께 절대적으로 충성을 하여야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하며,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주님께 절대 충성하며 주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모두 불법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떠나거라>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른 믿음을 가지지 않은 가짜는,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아버지의 뜻을 삶의 표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가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이 진리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지 말고, 잘 배워두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주님께서 너무나 분명하게 진리를 가르치시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그 진리를 망각하고, 내 편한 대로 살려고 하고, 내 입맛에 맞는 대로 행동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온유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내가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짓밟아 버리려는 이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내가 온유하게 살 수 있는가?” 그래서, 자기가 실수해도 미안해하기보다는 당당해하고, 무슨 일에서든지 일단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귀가 아프도록 듣지만,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누가 정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은 기독교의 이상론이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뭉개버립니다.
물질 문제, 섬김의 문제, 인내의 문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냥 적당히 쉬운 방법으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으니, 그냥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뭐 그렇게 복잡하게 살 필요가 있나... 난 이런저런 것 다 필요 없고,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복음이 좋아, 그것으로 만족해...”
그러나 여러분,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구원을 얻는 온전한 믿음이란, 말로만의 믿음, 적당한 믿음, 내 생각대로의 믿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이어야 한다고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우리 주님께서는 인정하시고, 받으시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이기에, 주님께서는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시면서, 쫓아내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쫓겨나는 인생은 참으로 처량하고 불행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 중의 하나가, 그들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이 바로 출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쫓겨남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쫓겨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이런 결과가 닥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믿음과 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말로만 떠드는 믿음이 아닌,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믿음생활을 하는지, 그리고 나의 행함이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인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다면 수정해야 하고, 돌아서야 한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돌이켜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사를 너무 늦게 반성합니다. 그래서 더 기회가 없을 때, 이렇게 말하곤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나에게 건강한 하루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정말로 값지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평생 건강할 동안, 그 많은 날과 세월을 어디에다 다 날려 보내고, 이제야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임종을 앞둔 분들은 이렇게도 말한다지요. “나에게 하루가 더 주어진다면, 온 종일 교회에 가서 기도드리며 찬송 부르다가 하나님께로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그렇게 새벽기도 함께 하자고 매주 광고를 했고, 예배에 빠지지 말라고 설교했고, 봉사 잘하라고 권면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고, 말씀 붙잡고 살자고 설교했는데, 그 설교와 권면을 받지 않다가,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그 시점에 와서야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분들에게도 분명히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시간에 이르러 미련이 남아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항상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주어졌을 때, 기회가 있을 때, 평소에 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Too late”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서, 다시 기회를 달라고 구하는 저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아마 이러실 것입니다. “이미 너에게 그렇게 할 충분한 시간을 주었는데, 지금 와서 그런 말 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라고요.
결론입니다. 우리의 삶 이면에는, 믿음과 행함 사이를 이간시키는 복병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은 엉망으로 살게 만들고, 믿는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어 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자기 기분 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죽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고, 불법을 행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저와 여러분들은,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보이며, 말씀대로 살고,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궁극적으로는 주님 나라에 초대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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