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과 아람(수리아, 지금은 시리아)은 자주 충돌을 하였는데, 어느 날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함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성 안의 백성들은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가는, 왕하 6:25절에서 잘 보여주는데, 보시면 “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전해준 율법인 레 11:4절을 보면,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할 때, 나귀는 말과에 속하기는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되새김질을 하지도 않는 동물>이기에,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귀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벤하닷의 침공으로 사마리아 성이 포위된 당시의 상황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귀 고기도 거래가 되었는데, 가장 먹을 것이 없는 머리도 <은 팔십 세겔>, 즉 노동자의 320일 임금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둘기 똥 1/4갑, 즉 1/8리터에도 5세겔, 즉 20일 노동자 품값을 내어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비둘기 똥은, 정말로 비둘기 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긴 하찮은 콩을 말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성경에서, <비둘기 똥>이라고 하는 것은, 원어가 <합분태>로 되어 있기에, 직역하여 <비둘기 똥>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성의 상황은 더 나빠져, 결국에는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너무 배가 고프다 보니, 이제는 눈이 뒤집혀서 자식이 식사 거리로 보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마리아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어진,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1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Good News를 전하는 것입니다.
왜 엘리사의 말이 기적을 선포하는 Good News일까요? 엘리사가 말하는 <고운 밀가루 한 스아>는, 약 7.33리터 정도인데, 그것을 한 세겔, 즉 4일 임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고, 보리 두 스아, 즉 15리터 정도를 역시 한 세겔, 즉 4일 임금으로 살 수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상시의 물가로 본다면,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4일 임금을 주고 사야 하고, 보리 15리터에 4일 임금으로 사는 것은, 상당히 고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사 직전의 상황입니다. 나귀 머리가 320일 임금에 팔리고, 합분태 1/8리터에 20일 임금을 내는 판인데, 갑자기 고운 밀가루와 보리를 그런 값으로 살 수 있다니, 그것은 대단한 바겐세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엘리사의 복음을 들은 한 장관이, 어떤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까? 본문 2절 상반절을 보십니다.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불신의 말을 내뱉은 것입니다.
이 장관이 어떤 사람입니까?, 왕이 그의 손을 의지할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는 장관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벤하닷의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그가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있을 것이라고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엘리사의 복음을 듣고, 보인 반응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리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의 말은, 상식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명철한 이성과 계산력을 가지고 판단하면 맞는 말이기에, 그는 그런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라고, 엘리사의 말을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보면서,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뱀의 공격을 받아 물려 죽어가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도록 하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다 낫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쳐다보면 산다고 해도, 쳐다보지 않고, 죽어갔습니다. 사는 길이 있다고 해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장관의 행동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은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에서도, 이 장관의 행동과 같은 점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무시하는 불신의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뱀에게 물려 죽어간 자들처럼, 엘리사가 외친 복음을 불신앙으로 거부한 장관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한낱 신화나 전설로 치부하고, 마치 엘리사가 외치는 복음을 듣고도 빈정거리면서,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한 장관과 같은 말을 합니다. 그것은, 똑똑한 것 같고, 이성적으로는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엄청난 실수를 하는 말입니다.
이런 실수는, 자기가 현명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범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그 구원의 복음을 비웃습니다.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의 메시지를 밟아 뭉갭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게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있는 것도 없게 하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굶어 죽을 지경에 있는 자들에게 “내일 이맘 때에 이 성 중에는 수많은 곡식이 쌓일 것이며, 사람들은 이 많은 곡식을 헐값에 살 수 있는 기적을 볼 것이다”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 멘> 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데, 누가 막아요! 사람이 막는다고 하나님이 못하시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일에는 무조건 <아~멘>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고후 1:20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장관은 달랐습니다. 이 장관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이 아니라, <노 댕큐>라고 하였습니다. 내 판단과, 내 상식과, 내 관찰로 볼 때, <아니다>는 겁니다. 알기는 잘 알았어요. 자기 생각과 자기 능력과 자기 힘으로 이 세상을 산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니 적의 포위를 받아, 굶어 죽어가는 마당에서, 당연히 “그건 아니야”라는 소리를 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암담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면, 거기에는 기적이 있고, 새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으로, 우리의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관은 그런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불신앙을 막 쏟아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이렇게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2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이 장관은 그 복음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그 장관의 불신앙의 대가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점검하여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으면서도, 불신앙적으로 말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를 점검하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엘리사가 외친 복음을 현실로 나타나게 하셨는가를 봅니다. 3절을 보면,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굶어 죽을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친구에게 서로 말합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라고요.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나병환자들이 장관과는 다른 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합니다. 장관은 <사태가 악화되었으니, 복음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남은 것은 죽는 것 뿐이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살길을 찾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사실 나병환자들이 굶어 죽을 상황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4절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보실까요?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살길을 찾자”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는, 적군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5절 상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들은, 서늘한 시간에 이동하려고 하였든지, 아니면 어둑해지면, 사람들이 자신들을 잘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시간대를 택하여 아람 진영으로 갔을 것인데, 그런데 5절 하반절을 보면, 그들이 아람 진영에 이르러보니, 그곳에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6절 말씀을 보면,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다”고 합니다. 환청을 듣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람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질 무렵, 4명의 나병환자들이 아람 진으로 향하고 있는 그 때에, 7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람 군대는 엄청난 환청에 놀라,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람 사람들이 들었던 병거 소리, 말소리, 큰 군대 소리의 환청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기적의 역사였는데, 그 기적의 역사는, 다름 아닌 나병환자들의 발걸음 소리를 그렇게 들리도록,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살기 위하여 적진으로 나아가는 4명의 나병환자들의 발걸음 소리를, 여호와께서는 아람 사람들로 하여금 병거소리, 말소리, 큰 군대소리로 듣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소리 지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나병환자들의 발걸음 소리로도, 아람 대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돌들도 소리지르게 하시고, 나병환자의 발걸음 소리로도 어마어마한 대군을 물리치시는 하나님께, <내가 붙들리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능력의 한계만 생각하고 살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편, 아람 진영에 이른 나병환자들은 8절에서 보는 것처럼 비어 있는 진영의 장막에서 먹고 마시고,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신앙으로 복음을 거부하고 죽기를 기다리던 장관’보다, 죽을 처지에서도 살길을 찾은 나병환자들이, 훨씬 복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나병환자들이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썩어 가는 몸을 가지고 천대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적들을 몰아내시고, 적들이 가졌던 모든 것을 안겨주셨습니다.
만약에 장관이 엘리사의 말을 <아~멘>으로 받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장관을 세워서,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관은 불신앙으로 복음을 받음으로, 버림을 받았고,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죽기를 각오한 나병환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하면서 얻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장관처럼 복음 앞에서 불신앙으로 대꾸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복음을 불신하는 것은, 패망의 첩경입니다. 반면에, 위기를 만났을지라도 “살아야 한다.”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을 견지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자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는 자보다는, 인내하고 버티고 살고자 하는 자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더욱 복음을 굳게 붙잡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내가 붙잡은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 가십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사십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는 넘칠 것이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고, 세상 살맛이 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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