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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3장33-43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25.04.13)
김태규 2025-04-13 추천 0 댓글 0 조회 47

2333-43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1, 143(141), 151(138)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주일날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하였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승리의 상징인데, 사람들은 그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당신이 우리의 구세주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며칠 후,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해 고소를 당하였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하던 그 무리들도,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님을 처형할 것을 외쳤고, 그래서 예수님은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펼친 본문은, 종려주일 후 5일 째가 되던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을 보도하는데, 3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합니다. 여기 해골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니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7: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을 골고다크라니온으로 소개합니다. “골고다란 아람어로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장소를 아람어와 헬라어로 표현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친절을 베풀고 있습니다.

 

마가도, 15:22절에서 그곳을 아람어로 골고다라고 하였고, 헬라어로 번역하여 크라니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아람어를 사용하지 않고 헬라어만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누가복음은 유대인들이 아닌 헬라 문화권에 속한 이방 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이방인들이 읽지 못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 표기는 배제하고, 헬라어로만 표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라틴어로 된 성경인 벌게이트(Vulgate) 역본에서는 해골이라는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갈보리” (Calvary)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은, 아람어로는 골고다“, 헬라어로는 크라니온“, 라틴어로는 갈보리로 표현되는데, 이는 모두 <해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장소가 해골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해골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아주 간결하지만, 이 간결한 표현 속에는, 인간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잔혹함과 고통, 처참함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저주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잔인한 처형법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경우에는 톱에 잘려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톱으로 몸을 절반으로 분리시키는 처형도 있었다고 하며, 때로는 사람을 끌어다가 기계 속에 넣어서 갈아 죽이기도 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잔혹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 형틀에 달아, 손발에 철로 된 대못을 박는 처형법은 어찌 보면 가장 잔인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톱에 잘려 죽는 것은 불과 4-5분 정도의 고통이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진액이 다 빠진 후에 죽게 하는 것이기에,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요, 철학자였던 시세로(Cicero),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잔인한 형틀에 매달렸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를 <아무런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지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크게 고민하며 기도하셨습니다. 26:38절에서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눅 22:42절에서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였고, 44절을 보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합니다. 몸부림치는 기도를 올렸던 것을 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그냥 쉽게 지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예수님께서는, 가장 잔인한 형틀을 앞에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는 마 27:46절에서 보듯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 이렇게 무거운 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해골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마다하시지 않으시고, 그 고난의 길을 자처하셨습니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본다면,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놓고 기도하시면서 피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나에게 다가온 힘들고 어려운 일은,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제가 피하고 싶습니다. 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 대한 성자 예수님의 절대적인 복종은,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모범과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나의 뜻을 행함으로써, 낙원이 황무한 광야로 변하였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겟세마네로 가게 되었기에, 이제 예수님께서는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순종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광야같은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민하시던 십자가를 지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는데, 그 사랑의 증거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 5:8절에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으나, 그런 중에도 34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저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저들이 자신의 옷까지 제비를 뽑아서 차지할 것을 알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 실천은 비웃음도 이길 수 있음을 35절에서 보여줍니다. 관리들은 비웃으면서 만일 네가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하라고 조롱하였으며, 36절에서는 군인들도 희롱하며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합니다. 신 포도주는, 목마름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인데, 그것으로 희롱의 의미를 극대화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37절에서 보는 것처럼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명 한마디, 불평이나 원망 한마디 안 하셨습니다. 원수를 향하여 욕도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27:44절을 보면, 예수님의 좌우에 달린 흉악한 두 강도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39절에서 보면, 한 흉악 강도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으나, 40절 말씀을 보면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기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동일하게 예수님을 욕하였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한 강도는 여전히 욕하고 비방하지만,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는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그 꾸짖는 자의 주장이 무엇입니까? 41절을 보면, 자신들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자신들의 악행 때문에 형벌을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함에 있어서 옳지 않은 것이 없으심에도, 부당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의 심령에 회심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을 42절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구원을 부탁하는 간구를 드리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비방하고 욕하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무죄하신 분이시고, 자신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고는, 자신의 구원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흉악한 강도의 마음을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입니까?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 예수님의 사랑이 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회심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런 일을 위하여 고통의 십자가를 달게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철 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사랑 때문이요, 그 십자가에서 아무런 비명과 불평 없이 오랜 시간을 견디신 것도, 사랑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요 13:1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에 마음이 녹아 회심한 강도가 구원을 간구하자, 예수님께서는 43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낙원이란 죽은 사람들이 가서 영혼의 상태로 거하는 처소로서, 16:22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도 표현되고 있으며, 고후 12:2절에서는 셋째 하늘이라고도 언급되는데, 4절에서는 그곳을 <낙원>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성도가 죽음 후에 부활을 기다리며 평안을 누리는 곳을 말합니다. 이에 비하여 천국은 하나님의 완전 통치가 실현되는 영원한 장소를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낙원은 완전히 분리하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흉악한 강도였던 이 사람은 오늘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이라는 말씀을 사용하신 것은, 두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는, 구원이란, 즉각적이고 현재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죽음 후에는 즉시 낙원에서 평강을 누린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확증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을 받는 자마다 구원을 얻습니다. 흉악한 강도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이 사랑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께 한 번 여쭈어 봅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랑을 믿음으로 받으셨습니까? 이미 받으신 분들은 많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이 사랑을 믿음으로 받지 못하신 분들은, 이제 그 사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주보에 실린 글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수학자요, 과학자였으며, 천문학자로서, 최초로 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의 무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도, 베드로에게 허락된 사면도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를 용서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용서와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누리면서, 감격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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