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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3장1-9 회복과 화평의 자리로 나아가자(25.09.14)
김태규 2025-09-14 추천 0 댓글 0 조회 27

131-9 회복과 화평의 자리로 나아가자 28, 299(418), 414(475)

 

아브람이 아버지를 따라 갈대아 우르로 이주하여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하여,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갈대아 우르를 떠나, 잠시 하란에 머물다가 2차 소명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었고, 믿음 중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가나안 땅에 이르자,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쌓은 제단이요, 감사의 제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삶의 자세는,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아가던 중에, 예기치 못한 기근을 만났습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깨우침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감사하고 예배하면서 살아가지만, 때로는 힘든 일도 생기고 어려운 일도 만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하며 기도하였더니,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예배하며 살던 아브람에게도, 기근이라는 절박한 문제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 절박한 삶의 문제를, 언약의 말씀 붙들고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만 애굽 행을 선택하였습니다. 삶에 좀 어려움이 찾아오니, 일단 살고 보자는 생각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보다 앞서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신앙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애굽으로 내려갔고, 바로 앞에서 거짓말을 하였고, 이런 일로 인하여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기근이라는 위기를 면해보려고 애굽으로 갔는데, 거기서 더 힘든 일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브람이 잘못하였지만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생명과 가정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잠시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결코 아브람을 잊지 않으시고, 그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많은 재물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아브람이 애굽 행에서 물질적 손해를 보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을지라도, 영적인 면에서는 큰 손실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던 이브람이, 기근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도 않고, 약속하시지도 않은, 애굽으로 내려감으로 크나큰 영적 손실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12:1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실까요?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이 말은, 아브람이 바로에게 거짓말을 함으로 인해, 바로로부터 책망받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에게 가르칠 때 써먹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아브람이, 이방인 바로로부터 이런 무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영적 손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수치와 무안을 당하는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아브람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아브람에게는 부끄러운 꼬리표 하나가 달라붙었습니다. 그래서 4,500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한편으로는 아브람의 믿음을 극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보여주었던 실수와 수치스러웠던 삶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아브람이 보인 부끄러움을 거울삼아,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직도 덜 훈련되어, 너무 약하며, 너무 깊이가 없기에, 너무 쉽게 흔들리고, 갈팡질팡하고, 그래서 이런저런 문제 앞에서 영적 손실을 당할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지 표면적인 손실이나, 물질적으로 잃는 것이 없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사업이 괜찮고, 내 건강이 괜찮고, 우리 가정이 사는데 별 어려움이 없으면, 영적 손실을 보면서도, 그게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참으로 위험한 삶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람도, 한 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손해 보는 삶이기에, 아브람은 본문 1-2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즉시 애굽에서 탈출하여, 일단 가나안 남방인 네게브로 빠져나왔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다시 회복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많은 재물을 얻었으나, 그것 때문에 바로와 함께 동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애굽에서 빠져나와, 3절에서 보는 것처럼 네게브에서 벧엘로, 또 벧엘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는, <전에 장막을 쳤던 곳>으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아브람의 이동 동선을 지도로 보도록 합니다. 보시는 것처럼, 애굽으로 내려가던 역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벧엘을 거처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보는 것처럼 처음 제단을 쌓은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말은, 아브람이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애굽에서의 잘못을 회개하며, 새 삶의 결의를 다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한 것입니다. 신앙인이 범죄하여 넘어질 수는 있으나, 그때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뜨거운 체험을 상기하며 회개하고, 새로운 결단으로 용기를 내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실수하는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 놀라우신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새로운 은총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는 <처음 제단을 쌓은 곳>에서 다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람은, 보시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시여, 앞으로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아브람은 완전히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새로운 회복의 삶을 살게 된 아브람에게, 또 다른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그런 사실을 5절과 6절에서는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되는데, 한 가지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많은 재물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바로가 아브람에게 재물을 줄 때, 조카 롯에게도 많은 재물을 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자기가 받은 재물의 일부를 나누어 준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브람과 조카 롯 두 사람 모두, 많은 재물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그렇게 두 사람 모두가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보니, 이제는 함께 거하면서 가축을 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껏 함께 동거하며 아름답게 유지해 왔던 화목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는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아브람과 롯 사이에서의 분쟁이, 목자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은 필연적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목초지와 샘의 근원을 확보하여, 가축 사육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최우선적인 임무는, 목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초장을 차지하려다 보니,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그곳에는 아브람과 롯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그 지역의 원주민들로, 아마도 아브람과 롯은 저들로부터 한정된 지역을 분할받아 가축을 쳤을 것이기에, 목자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초지를 선점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기에, 다툼은 불가피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소유가 넉넉해진다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화평이 깨어진다면, 그 넉넉함의 소유는 불행의 요인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복권을 사서 불로소득을 챙긴 사람들에게서 자주 봅니다. 그래서 부부가 이혼을 합니다. 가난하고 없이 살 때에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화목하였는데, 소유가 넉넉해지니 서로 반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아브람에게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아브람에게는 또 다른 시험 거리였고,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였습니까? 8절을 보면,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생긴 문제를, 서로 다투지 말고 좋은 방법으로 해결하여 화평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이런 권면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래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서로에게도 기쁨이 충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른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 아브람은 참으로 잘하고 있습니다. 종들이 서로 다툰다는 소리를 듣고는, 삼촌의 권위를 가지고 자존심을 세우면서 조카 롯을 꾸지람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서로 다투지 않는 방법을 논의해 보자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9절에서 보는 것처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카를 위하여, 기꺼이 우선권을 양보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양보한 것은, 애굽에서 사래와 공모하였던 세속적 처세술을 완전히 초월한 여호와 신앙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는, 세속적 처세술을 쓰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픔이고, 수치만 당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경험하였기에, 이제는 그런 얄퍅한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택권마저도 조카 롯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지금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면서 원하는 땅을 차지하라고 하는 말은, 모순이 있는 것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이미 가나안 족속들이 선점하고 있는, 주인 있는 땅인데, 아브람이 마치 자기 땅인 양, 롯에게 원하는 곳을 택하여 가지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람에게 이 땅을 자기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고, 그러므로 비록 아직은 그 땅이 자기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땅은 언젠가는 자기 수중에 들어올 것을 믿었기에, 조카 롯에게 원하는 땅을 선택해 가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의 말은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름다운 양보는 몇 가지 결과를 얻게 되었는데, 둘 사이의 불화의 틈을 탄 원주민들의 기습 공격 가능성을 막았으며 롯과의 종교적 화평을 유지함으로, 이방 사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고 아브람이 더욱더 하늘 분깃만을 의뢰하게 되므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덕망을 쌓는 3중 효과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한 공동체가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 희생은 결국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공동체의 평강과 유익을 위하여, 교회공동체와 국가 공동체의 평강과 유익을 위하여, 자기희생 정신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갈등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서로의 신앙의 칼라와 깊이가 각각 다르기에 일어나는 갈등이 있을 수 있으며, 서로의 성품과 배움의 정도로 인한 갈등 구조가 있을 수 있고, 취미와 기호로 인한 갈등 구조도 있으며, 소유의 정도나 심지어는 미모의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갈등 구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 가치관에 입각한 갈등 구조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갈등 구조는 깨뜨려야 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아브람이 보여준 겸손과 자기희생만 있으면, 이 문제는 아름답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교회의 힘과 능력을 진단하려면, 그 교회의 규모가 어떤가, 재정이 어떤가를 보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교회가 어느 정도 화목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원리는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인가 아닌가를 보려면, 그 가정이 화목한가 아닌가를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가 더 아름답게 서기 위해서는, 아브람처럼 자기희생의 양보를 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부부간의 갈등도, 성도간의 갈등도 다 해소되어, 가정에도 교회에도, 아름다운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복을 누리는 가정과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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