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이런저런 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중에서,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어려움은, 그냥 잘못의 대가로 받지만, 억울하게 당하는 어려움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예를 들면,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던 요셉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인신매매를 당했으니, 얼마나 억울하였겠습니까? 몇 주 전에 함께 살폈던 바울과 실라도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니, 역시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억울한 일이, 도리어 복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혹시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세속적으로 응대하다가 손해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역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 7:27-32절 말씀을 함께 펼쳤는데, 본문에도 억울한 일을 당했던 두 사람이 소개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구레네 시몬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억울함이란, 죄인이 아니신 예수님께서, 죄인처럼 취급당하셔서 28절에서 보는 것처럼 옷 벗기움을 당하시고, 29절에서 보는 것처럼 가시관을 머리에 씌워 고통스럽게 하였으며, 희롱도 하였고, 30절에서는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치며 모욕하였고, 31절에서는 당시의 가장 참혹한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갔다고 합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레네 시몬이 당한 억울한 일에 대해서는,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여기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 가게 하였다’는 말은, 구레네 시몬은, 자기 의지로는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로마 군병들이 강압적으로 십자가를 지웠기에, 어쩔 수 없이, 그야말로 재수 없이, 억울하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던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은,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구레네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구레네란, 아프리카 북동쪽 해안 지방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로, 오늘날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Tripoli)를 말합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구레네에는 일찍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회당을 지어 놓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3대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되었는데, 아마 이 구레네 시몬도,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왔다가, 도중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도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셨고, 구레네 시몬도 억울하게 십자가를 졌으나, 놀라운 사실은, 억울하지만,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나,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은, 결과적으로는 영광과 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빌 2:9-11에서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셨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리심으로 구주가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만인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천상천하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복종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짐으로, 그와 그의 가족들이 큰 복을 받았는데, 그가 받은 복부터 보면, 그는 붙잡혀 억울하게 십자가를 진 일로 인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신자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불신자가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타 종교인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킨다는 것입니다. 무슬림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기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유대교인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기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구레네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던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짐으로 인하여,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구원이 없는 종교에서, 구원이 있는 기독교로 들어오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짐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억지로 짐으로,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머물 수 있었고,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곁에 누가 있느냐, 어떤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생활이 바뀔 수 있습니다. 말썽꾸러기 친구와 가까이 있는 학생은, 문제아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존경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면, 그분의 삶을 닮아 갑니다. 물리학자와 가까이 있어 보면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고, 의사 선생님과 가까이 있어 보면 의사가 되고 싶고, 예수님을 잘 믿는 집사님이나 권사님이나 장로님 가까이에 있어 보면, 자신도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해 보고 싶은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레네 시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으면서, 예수님과 눈길이 몇 번은 마주쳤을 것이고, 그것을 계기로,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셨을 것이고, 그래서 이상하게도 예수님께 자기의 마음이 끌리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골고다에 이른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실 때 일어난 사건과, 또 막 15:39절에서 보는 것처럼,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외치는 복음을 들으면서, “그렇구나! 저분이 구세주 메시야구나! 저분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구나”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믿으면서, 유대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복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 또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는 막 15:21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에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시몬”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구레네 시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두 아들들의 이름이, 복음서에 언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들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이 두 아들들은, 평신도 지도자로 우뚝 서 있었기에,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의 영향으로 이렇게 존경받는 믿음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까? 바로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아버지 구레네 시몬의 영향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그 후로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전도를 받고 믿어, 존경받는 믿음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롬 16:13절을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는 말씀에 한 번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바울에게 ‘믿음의 자녀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종종 듣습니다. 디모데도 믿음으로 낳은 자녀였습니다. 믿음 안에서 형제 된 이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분들도 많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부른 것 외에는, 어느 누구도 내 어머니라고 부른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이렇게 친근감 있게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떤 이들은,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의 유모였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유력한 근거는, 행 13:1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와 교사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니게르’라는 시몬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며, 바울이 안디옥에 머물 때에 ‘구레네 시몬의 아내이며 루포의 어머니’였던 그 여인이, 바울을 아름답게 섬겨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레네 시몬이 억울하게 십자가를 졌다가 예수님을 감격스럽게 구주로 영접하고는, 확신 가운데 구레네로 돌아가서 무엇보다도 먼저 가족들에게 전도했을 것이고, 그러자 구레네 시몬의 전도를 받은 그의 가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 후로 시몬의 아내는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면서, 기회가 올 때마다 주의 종 바울을 신실히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는 모습을 본 바울은, 감격스럽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저분은 내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나를 대해주시는 분이야”라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바탕으로 해서, 바울은 시몬의 아내이며, 알렉산더와 루포의 어머니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경우는 다르더라도,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도 종종 있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준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케임브리지에 있으면서, 많은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심어주고 가셨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겠노라고 다부지게 움직이던 그런 모습이며,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앞장서서 섬겨주시던 분들, 제가 피곤하고 지칠 때, 따뜻하게 격려해 주심으로 위로를 주시던 그런 분들을, 저는 평생에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루포의 어머니가 성도들을 섬기며, 또 바울 자신에게 쏟아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마음에 큰사랑과 감격을 느꼈기에, 문안 편지를 쓰면서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구레네 시몬의 아내가 누리는 영광은 참으로 큽니다. 또 시몬의 두 아들이 초대교회에서 누린 영광도 큽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영광이 누구로 인하여 왔습니까?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기 까닭이 아닙니까? 억울하게 십자가를 진 일로 인하여, 자신도 복되고, 아내도 영광을 얻었고, 자녀들도 영광을 누렸습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구레네 시몬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마 16:24절의 말씀을 대하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께서 지게 하신 십자가를 지고, 복된 자리,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들입니다. 여러 모양의 사명이 십자가이고, 참아야 할 일, 당하여야 할 고통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달게 지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달게 질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억지로라도 그것을 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복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 5:41절에는 이렇게 권합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이는, 강요를 받아 억지로 봉사하게 되더라도, 겨우 오리 정도가 아니라 배나 감당하라는 의미입니다. 달게 감당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으나, 억지로라도 감당하면 복됩니다.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 ‘이런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만나고, 어떤 사건을 만날 때, ‘이것은 좀 억울하다.’라는 생각이 드실지라도, 그것을 ‘내 몫에 태인 십자가’라고 생각하시고, 그 십자가를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라도 그 십자가를 지시면, 여러분들 자신도 복되고, 여러분들의 자자손손이 복된 은혜를 누리는 역사를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좀 억울하지만, 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좀 섭섭하지만, 한번 견뎌보시고, 한번 참아보시고, 한번 수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당하는 억울한 일은, 감당하면 영광스럽고 복됩니다. 이런 사실은, 인신매매를 당하였던 요셉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번연을 통해서도 볼 수 있으며, 오늘 우리가 펼친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 예수님과 구레네 시몬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믿음으로 감당하고, 인내로 감당했더니, 결국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를 누릴 차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억울한 생각이 들지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감당하셔서, 결국에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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