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함께 펼친 본문 말씀 앞에는, 웃시야가 왕이 되어, 유다 나라를 강성케 만든 사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웃시야는 한 개인의 기업을 강성케 한 것이 아니라, 유다라는 국가를 강성케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펼친 14절 말씀을 보면,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였다”고 하며, 15절 상반절에서는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웃시야는 첨단 무기를 고안하여 강한 군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방력 강화와 과학기술 혁신을 이끈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중반절에서는 “그의 이름이 멀리 퍼졌다”라고 합니다. 나라는 점점 강성해져 갔고, 그의 명성은 주변 나라에까지 펴져 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이렇게 강성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웃시야 왕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15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란, 인간 한계를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우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승리한 사람들의 예를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도 한 예가 될 것입니다. 목동이었던 소년 다윗이, 키가 약 283cm 정도이고, 약 57.5kg의 갑옷과 투구를 쓰고, 긴 자루에, 약 7kg이 되는 날을 붙인 창을 가진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리고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힘으로나 재주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이한 도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이 되고, 지팡이로 나일강을 치니, 물이 피가 되고, 지팡이를 하수 위로 내미니(stretch out), 엄청난 개구리 떼가 생기고, 그래서 바로 왕이 벌벌 떨고,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반석이 갈라지고 물이 쏟아졌으며,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내미니까 홍해가 쫙 갈라졌습니다. 이게 인간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입으면, 내 손에 무엇을 가졌든지, 그것이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비록 내 손에, 몇 개의 돌멩이밖에 없을지라도, 지팡이 하나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힘입으면, 그것으로 칼을 이기고, 창을 이기고, 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좋은 무장을 하고, 아무리 좋은 전략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아무리 판세가 우세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예는, 히스기야를 공격했던 앗수르 왕 산혜립의 “침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산헤립이 침공하여 예루살렘 성을 포위함으로, 히스기야는 “마치 새장에 갇힌 새”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룻밤 사이에 산혜립의 군대를 18만 5천이나 죽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산혜립을 도우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혜립은 놀라서 고국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있으면, 거기에는 언제나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웃시야가 “여호와의 기이한 도우심”을 힘입어, 강성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 나아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힘입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지식, 우리가 가진 기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큰 위력을 발휘하는 그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기이한 능력으로 나를 도우시면, 비록 내 손에 돌 몇 개밖에 없는 것 같아도 무장한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팡이 하나만으로도 애굽의 바로를 이겼던 모세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승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기이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대하 26:4-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저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이 말씀에서는, 웃시야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힘입어 강성해질 수 있었던 비결 두 가지를 알려주는데, 하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호와를 찾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직히 행한다는 것은, 사람 눈이 아니라, 하나님 눈을 의식하며 사는 삶을 말하며,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것을 의미하는데, 한번 두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렇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웃시야는 그렇게 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웃시야를 형통케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개발한 기계며, 그가 사용한 전략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강성해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면서 널리까지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이 또 무슨 말씀을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16절 말씀을 같이 보십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이 말씀은, 웃시야가 강성해진 후에 잘못된 길로 갔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께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강성해지기를 원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강성해진 후에는 어떤 사람으로 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성공하면 무엇을 하시고 싶습니까? 여러분들의 학업이 끝나면, 무엇을 위하여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들이 돈을 많이 번다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시고 싶으십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생각은, 앞으로 나에게 돈이 많이 생기면 많이 구제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주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겠다고 생각하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잠시만의 생각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생각이, 여러분들이 성공할 때까지 만의 생각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생각이 여러분들이 강성해지는 순간까지만 여러분들을 좌우하는 그런 생각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생각이 여러분의 전 생애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는 생각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웃시야는 강성한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구하던 일을 그만두고, 이제는 마음이 교만하여졌다고 합니다. 여기 마음이 교만해졌다는 말은, 마음을 lift up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들어 올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을 그치게 되겠지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조심스럽게 행하던 삶이, 망가져 버리겠지요. 그러므로 성경은, 웃시야가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다”고 하는데, 그 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웃시야가 성전에서 여호와께 분향하려고 한 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것이 죄악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전에서 분향하는 일은, 제사장들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분향은, 왕에게 주신 임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웃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월권을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것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행동한 것은 모두 죄입니다.
그런데도 웃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성전에서 분향하려고 했습니다.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사랴가 이 일을 만류하였습니다. 얼마나 강력하게 만류하였는가를 17절과 18절을 통하여 봅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바니 성소에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예, 제사장 아사랴는, 80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웃시야에게 나아가서 만류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만류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로 간곡히 만류하였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일이 아니라,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력히 만류한 것입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그렇게 강력하게 만류해도 듣지 않고, 19절 상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였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보면, 만류하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웃시야의 고집과 교만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9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통해 경고하실 때, 웃시야는 들어야 하는데, 교만 때문에 그 경고를 무시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매를 맞고 나병환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웃시야는, 20절에서 보는 것처럼 성전에서 급히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왕궁에서도 쫓겨나, 죽는 날까지 별궁에 격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웃시야가 다시는 고침을 받지 못하고 나병환자로 죽었으며, 왕들의 묘실에도 묻히지 못하고, 그 인근에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멀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행하고, 여호와를 구하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기이한 도우심의 은혜로 형통케 하셔서, 강성한 나라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다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그의 선조들이 묻힌 거룩한 곳에 묻힐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강성해지니까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강성해지니,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취급하여,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 성전에서 분향하는 일도 월권으로 하려고 하였습니다. 제사장 수십 명이 극구 만류하였으나, 노를 발하면서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나병에 걸려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죽어서도 선조들이 묻힌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물이 되어버렸습니까?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합니다. 교만은 인생을 패망으로 이끄는 암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웃시야는 교만 때문에 인생을 망쳐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지 않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내가 형통할 때, 내가 잘 나갈 때, 번성하고 부할 때, 사업이 잘될 때, 자녀들이 성공하고 잘나가는 것을 볼 때, 조심해야 합니다. 더 겸손해야 합니다. 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우리가 잘될 때, 슬며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열심히 했으니까”, 아니면 “내가 실력 있어서 이렇게 되었지”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얼른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5:5절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곡식은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듯이, 사람은 높아질수록, 잘 될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계속해서 “기이한 도우심”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이루면 이룰수록,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겸손으로 무장하여,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여호와의 <기이한 도움>을 누려야 합니다. 은혜를 누릴 때일수록 더욱 그래야 합니다. 성공하였다고 생각할 때, 더욱 그래야 합니다. 신앙의 승리는, 현재가 아니라 끝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전 드립니다. 어려울 때는 낙심하지 않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으며, 형통할 때는 교만하지 않고, 더욱 겸손히 주님을 섬김으로, 주님께서 계속해서 기이한 도우심으로, 강성케 하시고, 형통케 하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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