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8장9-14 교회에 나와 유익을 얻은 사람 28, 212(347), 620
여러분들은 오늘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교회에 나오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교회에 나오심으로 무슨 유익을 얻고 계십니까? 제가 이런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가 읽은 본문은 교회에 나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교회에 나갔다가 큰 유익을 얻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였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비유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말씀하는 것이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가볍게 취급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상, 유익을 얻어야지, 유익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고, 마음까지 상해서 돌아간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함께 상고하면서, 내가 교회에 나와서 유익을 얻고 있는가? 아니면 전혀 유익이 없이, 시간 낭비만 하고 손해만 보고 돌아가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성전에 나온 두 사람은, 바리새인과 세리라고 밝힙니다. 이들이 성전에 나온 이유는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배시간 외에도 하루 세 번씩(아침6-9시, 12시-15, 오후 6시경)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풍습이 있었기에, 그들은 좋은 관습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좋은 관습은 배우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도 습관이 되면 쉽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은,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간다는 것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마치 자석에 쇠붙이가 끌리듯이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게 습관이 안 되면, 예수님을 믿기는 믿어도,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망설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성수주일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살기보다는, 아예 성수주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주님을 예배하면서,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리세인과 세리는, 주일 성수는 물론이거니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을 좇아 성전에 기도하러 나갔으니,, 얼마나 잘한 것입니까? 그런데 14절을 보시면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두 사람 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리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기에, 아마도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두 사람이 좋은 습관을 가지고 교회에 나왔는데, 세리만 유익을 얻었고, 바리새인은 유익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을까요?
이 부분을, 마치 흥부전을 읽으면서, 천대받는 흥부가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럼, 당연하지, 외식하는 바리새인보다야 겸손한 세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 낫지!”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선입관을 버리고 본문을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바리새인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하면 <나쁜 사람>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바리새인들이 늘 잘못되었습니까? 늘 오만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늘 잘난 척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리새인들의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쓴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는 정신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11-12절을 보실까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말씀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진지했고, 경건했으며, 금식하고, 십일조도 정확히 드렸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삶은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떻습니까? 늘 애처롭게 취급되고, 동정받아야 할 자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세리는 착취하는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기생충같이 동족을 괴롭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족들로부터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은 무조건 나쁘고, 세리는 무조건 좋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오늘 저는 이 고민을 같이 풀어보기를 원합니다. 이 고민을 풀지 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세리처럼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헷갈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헷갈리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자연히 <내가 생각하는 세리>처럼 살기 쉽고,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소서...”라고 <형식적이고 반복적인 기도>를 하면서, 별로 기쁨도, 평안도, 자유함도 없이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삶은 조심해야 합니다. 왜입니까?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가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 나는 불의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듯이 나는 불의한 사람입니다. 거짓도 했고, 간음도 했고, 갈취도 했습니다. 인간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잘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을 어쩝니까? 그러므로 저는 숨기지 않습니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이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옵소서”
어떻습니까? 좀 묘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기도는, 아예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많으시다는 것을 전제하고, 마음에 부담도, 가책도, 두려움도 없이 할 짓, 못할 짓 다하면서, 신앙으로 몸부림치며 지켜야 할 본분과 수고와 고생은, 예수 안에서 다 해결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습관적으로 회개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기도하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예배 후, 세상에 나가서도 경건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런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후에 세상으로 나아가 복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보면서, 그는 이제껏 불의하게 살던 것을 심각하게 정리하면서, 다시는 그런 자리에 들어서지 않겠다는 각오와 다짐으로 기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하면서, 13절에서 보는 것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이기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심각하게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세리는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경건하게 살고도, 기생충같이 산 세리보다 못하게 취급받았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의 기도 내용을 보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가 태반인데, 바리새인은 죄에 빠지지 않게 됨을 감사했고, 행위 온전함을 감사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을까요? 문제는 9절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죄인인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경건한 삶으로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며, 자기가 의롭게 산 것을 줄줄 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에게는 비극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롬 3:10절에서 보는 것처럼, 세상에는 자기를 의롭다고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이 진리를 부정하면서, 자기를 의롭다고 내세웠습니다. 그는 <나는 토색 안 했고, 불의 안 했고, 간음 안 했고, 십일조 드렸다는 것>을 무기 삼아, 자기의 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주제 파악이 전혀 안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만약에 이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은혜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오늘도 경건히 살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말씀대로 기도하며, 예물도 풍성히 드릴 수 있게 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인데, 주님께서 붙잡아주셔서 이렇게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의인은 없다고 하였사오니, 저는 아무래도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입니다. 하오니, 주님! 계속해서 저를 붙잡아주시고 더욱 경건히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자기보다 덜 경건하게 산 세리를 위하여서도 기도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주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을 받고, 세상으로 나아가 더욱 경건하게 살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제 파악을 잘못한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롭다고 뽐내면서, 자기의 행위를 줄줄 나열하고는, 11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외치면서, 자기 옆에 있는 세리를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가 바른 기도일 수 있으며, 이런 감사가 바른 감사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는 자기를 드러내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남을 무시하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덕을 세우면서 하는 것이요,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나아서 감사하고, 더 많이 가져서 감사한다면, 그것은, 남보다 못할 때와 남보다 적게 가졌을 때는,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인데,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많이 가져도 감사하고, 적게 가져도 감사하고, 남보다 뛰어나도 감사하고, 남보다 못한 부분이 있어도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 살전 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를 드러내면서, 남을 무시하며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틀림없이 불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한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참 감사는, 자기가 해 놓고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를 낮추고, 자기 의를 감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자기가 그 일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다고 하면서, 자기를 드러낸다면, 그 순간부터 감사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것은 자랑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내가 했으니 인정해 달라”는 교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렇게 하고 있으니,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경건했고, 열심이 있었고, 예물도 정성껏 바치는 수준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 의를 드러내려 한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 빛나는 열심과, 경건한 삶이 예수님의 칭찬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로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을 상을 만들어 놓고도, 그 상을 세리에게 빼앗겼습니다.
성경은, 성전에 나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고 깨어져,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크게 쓰임 받은 사람도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사 6:1, 5절에서 보는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서 자신의 추함을 발견하고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자복하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입술을 정하게 하셔서 거룩한 선지자로 섬기게 하셨습니다.
아삽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심각한 고민으로 갈등하던 중에, 시 73:16-17절에서 보는 것처럼, 성전에 들어감으로 그 고민을 말끔히 씻어내고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펼친 성경은, 교회에 나와 유익을 얻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신을 의롭다고 하면서 오만 불순한 것과, 죄인이지만 가슴을 치며 애통한 것의 차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도전 드립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런저런 일을 하고 난 후에는, 주님의 평가를 받을 것인데, 좋은 평가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좋은 평가는 아무렇게나 받는 것이 아니라, 경건히 살면서, 열심히 섬기며, 주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애쓰는 부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의 삶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 조심할 것은,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잘나서, 내 능력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감사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혹시라도 죄를 지었을 때는, 세리가 그랬던 것처럼 심각하게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여쭈어봅니다. 그 동안 교회에 나오셔서 얻은 유익이 있습니까? 여러 부분에서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올 때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예배하며,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감사하며, 어떻게 봉사하며 섬겨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으로 나가는 유익을 얻으시고, 그 은혜로,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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