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그리스의 3대 도시는 아테네, 스파르타, 터베라고 하기도 하고, 터베 대신에 델포이, 혹은 고린도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는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저 위치에 있었으며, 다음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동쪽에는 겐그리아(Cenchrea) 항구, 서쪽에는 레카이온(Lechaion) 항구가 있는, 세계적인 무역 항구 도시였기에, 경제적으로 굉장히 번영했고, 또 문화와 예술도 아주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가 더욱 부요해질 수 있게 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지중해를 지나는 배들은, 고린도의 두 항구에 들린 후, 고린도를 둘러싼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 항해해야 했는데, 그때, 3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해적과 거친 풍랑과, 그리고 오랜 항해를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안 고린도 사람들은,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아테네와 고린도를 잇는 병목 지역에, 통나무 롤러 길을 만들어, 배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가지 않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입니다. 지금은 저곳에 고린도 운하가 만들어졌지만, 당시에는 다음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저런 길을 만들어, 통나무 롤러로 모든 배를 운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를 축적하게 된 고린도는, 쾌락을 추구하며, 특히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도, 남자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창녀들을 골라서 자리를 같이하는 공식적인 순서가 있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사생활은 말할 것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잘되고, 부자가 되고, 명성이 높아질수록, 더욱 조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경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만해지며, 결국은 타락의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인들 역시 부유해지니까 타락의 길로 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고린도에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우리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 심판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불 심판을 하신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를 그곳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고린도는 음탕하고 방탕한 도시였지만, 그럼에도 그 성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도 바울을 그곳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을 하는 중에, 고린도에 들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도시에서, 너도나도 예수님을 믿어, 고린도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타락하고 방탕하여, 도무지 예수님을 안 믿을 것 같은 도시였으나, 바울의 전도를 받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을 목회하여, 교회를 잘 세워 놓고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이유는, 사도 바울은 한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가 아니라,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순회 선교사였기에, 계속해서 고린도에만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정든 교회를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으로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 교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히 걱정되었으나, 몸이 하나뿐이니 고린도에 갈 수 없는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알리고, 그것을 바로 잡으라고 지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전체를 읽어보면, 바울은 강한 어조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질책하며, 훈계합니다. 비방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서로 합하라. 상은 하나님이 주시니,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말라, 말로 떠드는 삶을 살지 말라, 음행을 삼가라,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을 삼가라, 분쟁하지 말고, 사랑하라... 등등을 가르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꾸중과 강한 책망으로, 그들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 편지를 쓰는데도,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니, 우선은 감사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음탕하고 방탕한 도시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그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성도들을 생각하니, 너무너무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문제가 있고, 창피한 일이 있어서, 책망을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구원받은 자들이기에, 바울은 이 부분이 너무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구원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좀 문제가 있고, 좀 책망을 들을 부분이 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보장되는 은혜>가 있기에, 지금 바울은 그것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국가도 다르고, 삶의 스타일이 각각 달라도, 단지 두 부류로 분류되는데, 한 부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좀 잘못된 부분이 있고, 천대받고 멸시받는 자라도, 구원받고 영생하는 복을 누릴 것이지만,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은, 왕이라도, 대통령이라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수받는 유명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착해 보여도, 멸망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좀 모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책망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었기에, 죄에서 사함받고, 구원을 얻어, 영생복락을 누릴 자들이므로, 바울은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몽테스키외가 여행하는 중에 배를 타게 되었는데, 뱃사공을 보니 너무 어린 두 소년이었고, 어쩐지 슬픈 모습이 역력하여, 몽테스키외가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형제냐?” “예”, “아직 공부할 나이인데, 왜 학교에 가지 않고 사공 노릇을 하느냐?”
그러자 두 형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답니다. 아버지는 상인이었는데, 아프리카 북쪽을 지나가다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사간 주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4천 리브르(Livre, 약 150년 임금, 프랑스 혁명 후에 프랑으로 바뀜)를 주면,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에게는 엄두도 못 낼 큰돈이지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낮에는 사공으로, 밤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몽테스키외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 형제에게 4천 리브르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누가 그 돈을 보내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는, 자기들이 받은 돈을 아버지가 노예로 팔려있는 집으로 보냈고, 그로부터 두 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몽테스키외가 세상을 떠나자, 몽스키외의 친구들이 그의 전집을 만들기 위해 그의 일기장을 보았는데, 거기에 두 형제에게 4천 리브르를 보내어 아버지를 구해 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래서 이 사실이 형제들에게도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와 두 형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몽테스키외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노예로 있다가 구원받은 정도의 경우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사탄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이며, 영원한 사망과 지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고 돈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물론, 저와 여러분들도, 자다가도 일어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살다 보면, 건강하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며, 사업이 잘되기도 하고 부도가 나기도 하고, 가정이 화목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은 안전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해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열림교회에서 청년부를 지도하시던 조인제 목사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울상이 되어 교회에 왔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공부가 너무 안 돼서 그런다고 하더랍니다. 그러자 조인제 목사님이, “아, 그러면 하나님께 감사헌금 내어야겠네요”라고 했답니다. 쉽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그래야 맞는 것입니다. 그래야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책망하는 편지를 쓰면서도, 그들의 삶과 행실을 보면 너무 부족하고 못났지만, 주님께 당장이라도 심판하실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보장된 자들이기에,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 보는 것처럼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또 다른 은혜가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풍족하다>는 말은 ‘엄청난 거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는 은혜 외에도, 입에 복을 받아서, 말을 잘 못하는 사람, 말주변이 없는 사람도 말을 잘하게 되는 지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어카를 끌면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사람들도, 유식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좀 달라졌습니다만, 제가 한국에서 신앙생활 할 때 보면, 교회 권사님들은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 아닌데도, 입만 여시면 어디에서 그런 지혜로운 말씀이 나오는지 놀라웠습니다. 기도를 들어보면,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런 게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깊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언변만 좋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풍족하게 한다고도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는, <어떻게 하면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사는가? 어떻게 하면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는가? 어떻게 하면 효자가 되는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면, 지식인 중에서도 지식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은 아내를 죽이고, 자기 아이들을 죽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남편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모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녀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런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 가는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복되게, 지혜롭게 사는 지식을 다 배우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런 은혜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6절에서는,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전해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린도 교인들이 받아들인 후, 그 복음이 구원을 얻은 것 뿐 아니라, 그들 안에서 말씀이 굳게 자리를 잡아, 견고한 믿음으로 서서, 이제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증거가 마음에 견고히 자리 잡고, 믿음으로 견고히 서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7절에서 가르치기를,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에 견고히 선 자들에게는, 풍족한 은사를 주셔서, 재림해 오실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살게 하십니다.
부연 설명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시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유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릴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구변과 지식의 풍족함과 견고한 믿음에 서서, 부족함이 없는 은사를 받고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8절에서는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라고 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사실, 처음에 고린도에 복음을 전할 때는, 그 도시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을지, 그렇지 못할지 아주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안에 있어, 고린도 교회가 든든히 서서, 예수님의 증거가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으니,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소망을 가지는 것은, 비록 지금 저들에게는 부끄러운 죄가 있고, 교회에 풍파가 있고, 문제가 많아, 그들을 보면 걱정이지만, 주님을 보니 걱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께서, 끝까지 그들을 밀어주시고 세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연약한 우리가 기대어도 피곤해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실수할지라도 끝까지 세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예수 안에 있으면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해 주시는 구원의 은총과 더불어, 덤으로 주시는 은사와 복을 넘치도록 누리시면서, <하나님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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