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장15-26 버림받은 일꾼, 쓰임받는 일꾼 28 312(341) 340(366)
이런 질문을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일까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서 답을 할 수 있을 것인데, 저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다면, 황홀한 감격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으면서, 황홀한 감격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불행한 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행 1:15-26절을 함께 펼쳤는데, 이 말씀에는 버림받은 일꾼과 쓰임받은 일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맛디아는 쓰임받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별과 같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룟 유다는 버림받아 불행한 자가 되어버렸을까요?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불행의 길로 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로 부름받아,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고, 엄청난 진리를 배웠으며, 예수님의 신임을 받음으로 회계의 일을 맡아 섬기던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참으로 복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본문 16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어떻게 하다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을까요? 요 12:6절에서 보면, 그는 탐심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돈을 훔쳤다고 합니다. 성경은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였으며,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유다는 말씀을 어기고, 탐심을 품고, 도적질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의 탐심은, 또 다른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마 26:15절을 보면,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죄책감은 있었으나, 회개는 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 27:5절에서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서는 더욱 비참한 사실을 알립니다. 보실까요?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아마도, 유다가 목메었던 끈이 끊어짐으로, 몸이 땅바닥에 곤두박질하면서, 그 충격으로 배가 터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불행한 생을 마감한 유다를 향하여, 본문 25절에서는 “유다는 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를 버렸다>는 것은, 자기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직책을 감당하지 못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며, <제 곳으로 갔다>는 것은, 죄인이 돌이키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가는 곳인 지옥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니, 그가 갈 곳은 바로 그곳뿐인 것입니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은 각기 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돌아서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 사 53:6절에서는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돌아서기 전까지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가는 길의 방향을 전환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얻은 백성이 되었고, 하늘나라를 보장받은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하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버림받고, 제 곳으로 가버렸을까요? 요 13:2절에서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하며, 요 13:27 상반절에서는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 지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다는 마귀에게 완전히 지배당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교훈과 도전을 받아야 합니까? 사탄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도 유혹하여 넘어뜨렸기에, 저와 여러분들을 유혹하여 넘어뜨리는 것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도 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정말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하였기에, 이런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요 13:27절 하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간 떨어지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 선생님을 배반할 것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는, 요 13:26절에서 보는 것처럼,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라고 하시면서, “곧 떡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다면, 유다는 즉시 회개하여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 13:30절을 보면,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반역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대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께로 와서는, 예수님을 잡도록 사인을 주려고, 마 26:49절에서 보는 것처럼,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위선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유다는 그렇게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도 그런 유다를 버리셨기에, 유다는 제 갈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유다 대신에 한 사람을 세워, 12사도의 수를 보충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의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는, 단순한 인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적 증인의 완전성을 위협하는 문제였기에, 초대교회는,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사도의 수를 보완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본문 22절을 보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1 사도들이 논의한 바가 소개되는데,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23절에서 보는 것처럼 사도들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하는 요셉과 맛디아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제비를 뽑기 전에, 24절에서 보는 것처럼,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둘 중에 택하신 바 된 자가 누구인지를 알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최선을 다해 분별했지만, 최종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밝히기를, 25절에서 보는 것처럼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행하던 유다가,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가버렸기에, 이제는 유다를 대신할 자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유다 대신에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수행할 자인지를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합니까? 무슨 일을 놓고 기도합니까?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도 고집을 부리면서, 결정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잠 16: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도,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가졌던 그런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물으며, 지도를 받으며, 움직이고,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문제를 놓고 결정할 때도, 고집을 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옳음과, 하나님의 공의는 같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와 완전한 사랑이 충돌되지 않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대 선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최선을 다하여 요셉과 맛디아를 선별하고는, 기도하면서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 후에 사도들은 26절에서 보는 것처럼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출하였습니다. 그래서 맛디아는 열한 사도의 수에 들게 됨으로써, 결원되었던 12 사도의 수가 다시 충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가 된 맛디아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쓰임을 받게 되었을까요? 22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이 말씀은, 유명한 사람을 사명자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유명한 사람을 사도의 조건으로 삼았다면, 맛디아는 사도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맛디아는 여기 외에는 더 이상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를 사도로 세운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다른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맛디아가 사도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자격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3가지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절 말씀도 보아야 합니다. 보시면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근거할 때, <항상 우리 가운데 함께 다니던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부터 줄곧 함께 하였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맛디아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후부터, 이제껏 변함없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섬기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12 사도의 수에 가입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자격이었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동행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우리와 더불어>라는 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이제까지도 항상 우리와 함께 다녔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마음과 뜻을 같이하면서 일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변함없이, 초지일관하게 믿음을 지키며,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신실하게 섬길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려면,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재능보다 지속적인 충성을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마음과 뜻을 같이하겠다고 해 놓고, 잘 섬기겠다고 해 놓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가 생기겠지요? 비난받고, 비난하는 일도 생기겠지요. 그러므로 일꾼으로 세움받은 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마음과 뜻을 함께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부분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메시지의 초점은, 언제나 ①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②죽으심과 ③부활에 맞추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특별히 부활을 강조하기를, 고전 15:14절에서 보는 것처럼,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우리 믿음도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한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독교의 중심 교리로 삼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12 사도의 수에 가입한 맛디아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맛디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데, 맛디아는 흔들릴 수 없는 부활 신앙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맛디아가 확실한 부활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현장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번 나타나셨을 때, 부활의 주님을 보았을 수도 있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해 올라가실 때 보았던 무리들 중에, 맛디아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①언제나 공동체와 함께해야 하며, ②또한 지속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그리고 경험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확신하는 믿음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쓰시기도 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시기도 합니다. 버림받은 자는 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맛디아처럼 ①확고한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여, ②언제나 공동체와 함께 움직이며, ③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섬길 때, 주님께서는 더욱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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