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롬 10:17절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들었다고 모두가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믿음으로 반응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없고, 어떤 사람은 비웃고,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들은 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 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생기기도 하고 불신앙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은 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서 9장 중의 일부를 펼쳤는데, 본문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 들은 자들이,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인 반응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지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교훈받고 도전받기를 원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를 함락시켰으며, 아이 성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둔 사실과 연관이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소문은 두루 퍼지기에, 오늘 본문 1절 말씀에서도,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 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거민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살던 족속들의 수를 세어보면, <헷 사람, 아모리 사람, 가나안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 이렇게 여섯 족속입니다. 그런데 수 3:10절을 보면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기르가스 족속이 하나 더 끼어, 일곱 족속으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성경 다른 곳에서도 가나안 땅에는 일곱 족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섯 족속만이 언급된 것은, 가나안 땅에는 단지 여섯 족속만이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본서를 기록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살던 족속들을 언급하면서, 별의미 없이 기르가스 족속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맛있는 많은 음식을 먹었을 때, 먹은 것 모두를 말하지 않고, “김치도 먹고, 만두도 먹고, 불고기도 먹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튼,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넘쳐흐르는 요단을 건넌 소문, 여리고가 무너졌다는 소문, 아이 성이 패배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하여 들은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라고 합니다. 그들은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잘하는 것입니까? 무모한 짓이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백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싸운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 되므로, 가나안 일곱 족속이 연합하여 싸운다고 해도,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과 싸워 이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족속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이스라엘과 싸운다는 것은, 무모한 짓인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싸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 5:1절을 보실까요?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비록 그들이 연합하여 싸우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요단강은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 3:16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런 강물을 아래위로 갈라지게 하여, 위쪽에서 흘러오던 물이 그쳐, 쌓이고 쌓여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였다”고 합니다.
지도를 한번 보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저 여리고 근처의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사르단 가까운 아담 변두리는 어디쯤입니까? 다음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는 곳에서 약 30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이 갈라지면서, 흘러내리던 물은 역류하여, 30km 정도 올라갔으니, 요단강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기에, 물이 끊어진 지점의 <물의 벽 높이>는 약 3m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경사가 좀 더 컸다면, 4-5m의 벽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단강을 건넜다고요.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상상하지도 못할 일 아닙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마른 땅 건너듯이 건넜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거민들은 그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여리고도 무너졌다고 하며, 아이성도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소문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항복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를 않고, 힘을 합하여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잘못한 것입니다. 전쟁은, 용기를 내어 싸워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싸우는데, 무슨 승산이 있겠습니까? 무모한 짓을 하려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지를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그 뜻대로 행하시는데,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위배되는 삶을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라고 하시고, 사랑하라고 하시고, 섬기라고 하시고, 열심을 내라고 하시고,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그대로 행하라고 하시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징계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고집을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저 가나안 땅의 거민들이 보인 반응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요? 저 가나안 거민들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지만, 그 중에서 한 족속이었던 기브온 족속이 달리 반응하였던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브온 족속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3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게 행한 일을 듣고는, 다른 가나안 족속들과는 달리 반응하였는데, 6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화친 조역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무엇을 봅니까?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듣고, 똑같은 것을 보아도, 반응은 달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브온 족속은, 가나안의 다른 족속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고, 여호수아를 찾아가서 화친 조약을 맺자고 제의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브온 사람들을 보면서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싸운다면 전멸 당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무모하지만, 싸우면 질 수밖에 없음을 미리 판단하고, 이에 대처하는 자들은 현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4:31-32절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그런데, 기브온 족속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잘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살아남아, <느니딤> 사람들로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꾼들로 쓰임 받았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족속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록 그들이 힘을 합하여 대적하였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연합은 강해 보였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연합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것입니까? 이유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고도,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께 무릎 꿇지도 않았고, 의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의 소식을 듣게 하여, 회계 하도록 경종을 울리셨음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항하려고 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은 달랐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듣고는, 분별력을 가지고, 여호수아를 찾아 만나 화친을 청하였습니다.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등한 입장에서의 화친이 아니라, 그냥 살려만 달라고 하였습니다. 멸망이 다가오는 시점에서는, 구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그들이 그런 화친을 청할 때, 정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라고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꾀를 내어 마치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가장하여, 여호수아가 있는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를 만나 <우리는 매우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화친을 청하며 살길을 찾으려고 한 것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가나안 땅의 거민임이 밝혀지면, 여호수아가 그들과 화친을 할 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의 생명은 보존되었으나, 종의 위치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 패고 물 긷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구원과는 멀어지지 않았으나, 삶에는 곤고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 편에 선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거짓된 삶에는 곤고가 따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기를 원하였던 그들은, <느디님> 사람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느디님>이란 <주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혈통에 속한 자들이 아닌, 잡족들에게 붙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벨론 포로기에도 이스라엘과 함께 하였고, 귀환 후에는 그들이 성전 건축에도 힘쓰는 등, 귀하게 쓰임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반응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두려워 떨면서도 하나님께 무릎 꿇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부류는, 꾀를 내어서라도 살려고 하였습니다. 생명은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며, 하나님의 말씀도 계속 선포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고 계십니까? 현실을 기준으로, 내 생각대로 반응하시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믿음으로 반응하시고 계십니까?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각자가 감당하여야 합니다.
듣고, 깨닫고, 바른 반응을 보이고, 순종하는 반응을 보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렸던 두 강도를 보십시오. 둘 다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한 강도는 회개하고 낙원을 허락받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운명이 달라지는 은혜와 복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바르게 반응하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여야 합니다. 순종으로 반응하여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반응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순간 순간 베푸시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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