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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 바이블 투어
김태규 2010-06-21 추천 4 댓글 0 조회 6842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 크리스찬 투어, 자료제공: 김태규 목사

박물관 마당에 들어서면서 전경을 바라보면 박물관은 그리스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용된 원주 기둥들은 일찍이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었던 것들과 모양이 흡사하며, 박물관 입구의 정면 처마 위에 있는 조각들은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것을 그대로 갖다가 붙여놓은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 앗수르 Room ★★★ 

☞ 살만에셀 3세의 전승기념비: 왕상20:1 "아람(다메섹 또는 시리아) 왕 벤하닷이 그 군대를 다 모으니 왕 32인이 저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치며 사자들을 성중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벤하닷은 이르노니 네 은 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식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이 말은 아람(시리아라고도 함)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는데, 엎치락뒤치락 끝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왕상22:1을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3년을 지내었더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3년간 서로 전쟁을 하지 않고 지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가 서쪽으로 침공을 해왔기 때문에, 하맛왕이 이스라엘 왕 아합과 아람 왕 벤하닷을 비롯한 인근 12왕의 후원을 받아 연합군이 살만에셀 3세를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이 3년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염두에 두고 살만에셀 3세의 전승비를 보게되는데, 그 기념비에는 당시 12연합군의 규모가 어떠했으며 살만에셀은 그들을 어떻게 정복했는가를 소상히 기록해 놓고 있다. 즉 「연합군과 살만에셀 3세는 하맛(Hamath) 근처의 칼카라(Karkara = 종종 Qarqar라고도 함)에서 교전했는데, 살만에셀은 이에 대해 기념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Karkara에 접근해서 그 도시를 파괴시키고 찢었다. 그리고 왕실 공관인 Karkara를 손에 넣었다. Karkara 왕은 다메섹 하다더저(Hadadezer = 벤하닷Ⅰ)로부터 마병 1,200. 기병 1200, 보병 20,000과 이스라엘 왕 아합으로부터 마병 2,000, 보병 10,000을 지원 받았으나 그들의 시체는 강을 막아 댐을 만들었고, 골짜기마다 피가 흐르는 위대한 승리를 얻었다". 그 리고 그 비문에는 동맹군은 보병이 50,000, 기병 14,000, 마병 4,000」이라고 적고 있다.

 

하맛에서 연합군이 패한 후 그들은 서로 흩어졌다. 그런데 얼마 후에 유다왕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하였다. 사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분열왕국 초기부터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게 되었다. 즉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의 혼인으로 인해 사돈 관계가 형성되면서부터 두 나라는 서로 동맹관계로 들어섰다. 그들이 이런 일을 시도한 이유는 북방의 앗수르가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데 대한 방비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사밧이 신앙적으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아합과 동맹한 것은 장차 유다 왕국의 신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문을 여는 큰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지적해야한다. 아무튼 동맹관계에 있던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하자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길르앗 라못을 치기로 제의하였다. (왕상22: 2- "유다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이에 여호사밧은 "아람군대를 쳐야 되는지 하나님께 물어보라"고 권했고 아합은 벤하닷을 침공하기 전에 선지자들에게 물었으나 미가야 외에는 모두 거짓 예언을 하여 “그 일이 길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아합은 불길한 징조를 바르게 예언한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고 전장에 나갔다. 아합은 불길한 마음에 그것을 떨쳐 보려고 여호사밧과 옷을 바꾸어 입고 변장을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합은 비참하게 전사한다. (그 내용은 왕상22: 29-36절에서 소개된다.) 아합의 이러한 죽음은 왕상 21:19의 예언대로 되었으니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 앗수르나 시르팔 2세의 전승비: 살만에셀 3세의 전승기념비와 아버지 앗수르나시르팔 2세의 전승기념비가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살만에셀 3세는 아버지 앗수르나시르팔을 아주 존경했기에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마다 부친의 전승비와 똑 같은 전승비를 남겼다. 우리는 그 기념비를 통하여 당시의 제사나 예배 형식이 어떠했는가를 볼 수 있는데, 아래에서부터 태양신 Shamash, 폭풍의 신 Adad, 달신 Sin, 사랑과 전쟁의 여신 Venus, 그리고 맨 위의 나팔을 새겨 넣은 헬멧은 최고의 신인 아수르 Ashur이다. 왕의 왼쪽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들고 있다.

  

☞ 흑방첨탑: 살만에셀 3세가 니므롯 궁에 만들어 둔 것이다. 이 흑 방첨탑 (Black Obelisk)은 6척 반 (약 1.95m)으로 위가 좁119-120아지는 4각이며 4면에 그림과 글로 되어 있으며, 위로부터 둘째 열에 있는 한쪽 면에는 예후가 살만에셀 3세에게 굴복하고 있는 것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 밑의 원문은 "오므리의 아들 예후(Yaua, son of Humri, 즉 Jehu, took the throne from a descendant of Omri)가 아주 진귀한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후가 왕이 된 것은, 아합의 사후 (after dead) 그(아합)의 아들들이 통치 (853-841BC)했으나 하나님은 엘리사를 시켜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아합 가문을 대신해서 왕이 되도록 했으며, 그 후 예후는 아합 가문을 비참하리만큼 전멸시켰다. (왕하 9:1-10:17) 그는 무자비하게 행했으나 이것은 엘리사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예후의 죄는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 제단을 멸하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한다.(왕하 10: 31) 그것 때문에 841BC에 이방인인 살만에셀 3세에 의해 굴욕 당하고 통치는 끝을 맞았다. 성경은 예후가 아람왕 하사엘에게 시달림을 받은 것만 말하고 있지만, 흑 방첨탑을 통해 예후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다.

  

☞ 사람의 머리를 가진 날개 달린 황소: 니므롯 왕궁의 앗수르나시르팔 2세의 왕실 입구에 서 있던 것이다. 이것은 수호신으로 5개의 다리를 가졌으며 지적인 의미와 힘, 그리고 왕의 영향력과 통치력을 보여 준다. 5다리를 새긴 것은 이 수호신이 앗수르를 보살피려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 발라왓(Balawat)의 대문: 살만에셀 3세가 자기를 위해 지은 제2 궁전인 발라왓의 대문이 발굴되었다. 그 문은 청동 띠로 치장되었고 무늬를 새겼는데, 하맛 전투에 관한 것이다. 그 옆의 벽에는 이 대문의 본래 크기를 복원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발라왓 대문의 맞은편에는 당시 이 대문을 만들기 위해서 어디서 백향목 나무들을 옮겨왔는가에 대한 기록이 담긴 돌이 전시되어 있다.

  

☞ 니므롯 궁: 앗수르나시르팔 2세의 '니므롯 궁'은 890 에이크의 성벽으로 된 도시였고 그 왕궁은 50 에이크의 벽으로 쌓였고 건축은 50년에 걸쳐 지어졌다. 여기에 있는 것은 그 일부이다. 앞에서 본 흑 방첨탑(Black Obelisk : 841BC에 살만에셀 3세가 만든 것)이 여기서 발굴 됐다. 궁의 벽화를 보면 여러 수호신들이 있고, 당시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도 생생히 보인다. 특히 그 당시의 전차포와 유프라데스 강을 도하하는 장면은 시선을 주목시킨다. 그들은 튜브를 타고 강을 건넜고,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튜브로 잠수하였다.

  

☞ 티글랏 빌레셀에 관한 유적들: 살만에셀 3세가 824BC에 죽게되자(그 후 약 80년간은 앗수르와 팔 레스틴 간에는 실제적 전쟁은 없었다.) 앗수르는 쇠퇴기를 걷게되었다. (앗수르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765와 759BC에 큰 전념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763년 6월 15일BC에는 해가 완전히 없어지는 큰 일식이 있었다고 한다. (A. T. Olmstead, History of Assyrian, Chicago University Press, Chicago, 1923, PP169-74; 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Grand Rapids, Mich, Zondervan Publ. Co. 1970, P.327).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때에 요나가 니느웨로 파송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즉 이때 하나님은 요나를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로 보내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때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왕에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며 회개하였다.(욘3: 5-10) 아마 745BC에 총독으로 있던 티글랏 빌레셀 3세가 정권을 잡은 것이 바로 그러한 때일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요나가 활동할 당시의 이스라엘 왕이 여로보암 2세였고 그 통치 시기는 793-753BC, 혹은 782-742BC였으므로. 이 연대는 티글랏빌레셀 3세(745-727BC)가 통치한 연대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볼 때, 하나님은 쇄퇴해가는 앗수르에 요나를 보내신 뜻은 비록 이방인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음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회개한 앗수르는 다시 한번 기세를 펴는데, 티글랏빌레셀 3세는 정권을 잡은 후에 살 만에셀 3세의 정책을 살려 강력한 정벌사업을 벌였는데, 이스라엘을 두 차례에 걸쳐 침공하기도 했다.

성경은 티글랏빌레셀을 9번 언급하고 있는데, 가끔 그의 별명인 '불'로 언급되기도 한다. 우선 왕하15: 19-20을 보면 므나헴 재임시 '불'이 와서 침공했으므로 므나헴은 많은 조공을 바친 것으로 언급한다. 이와 관련된 사실은 티글랏 빌레셀의 연대기에 명시되어 있으나, 이 연대기는 대영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고, 우리가 대영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연대기 일부로서 그가 어떻게 두 번째로 이스라엘을 침략했는가와 다메섹을 정복키 위해 계속 진군한 것과 732BC에 시리아(아람)의 옛 왕국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 두 번째 침공은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있었다. 대상5: 25-26을 보면 불이 와서 아람왕 르신을 멸하고 베가를 벌한 것을 소개하는 이러한 내용은 티글랏 빌레셀의 연대기에서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앗수르 왕 티글랏 빌레셀이 길르앗 (Gilead)에 있는 아스타롯 (Astartu)를 사로잡았음을 적고 있다. 그림에서는 왕은 아랫 부분에 보이는데, 반면에 그 위로는 전리품과 이스라엘 죄수들이 끌려가고 있다. 이것은 왕하 15:29절의 성경 기록을 확증해 준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 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뿐만 아니라 그 조각품들은 티글랏 빌레셀이 이스라엘 왕 베가를 벌한 것과 아람 (시리아) 왕 르신을 멸하고 동시에 시리아의 종국을 고하게 한 것(732BC)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베가는 740BC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티글랏 빌레셀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중에 (왕하 15:19참고) 내리막길에 있는 유다를 공략하기 위해 시리아 왕 르신과 동맹을 하고 유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유다왕 아하스는 이사야의 충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라는 충고였음)를 무시하고 동맹군과 맞섰으나 패전하고 120,000명의 군사가 죽었고,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었다. 아하스는 필사적으로 앗수르왕 티글랏 빌레셀에 사람을 보내 조공을 드리고 도움을 청했고 불(pul)은 즉시 와서 베가와 르신을 굴복시키고 이에 시리아는 732BC에 종국을 고했다. 성경 왕하 16:7-9 에서는 아하스가 티글랏빌레셀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언급된다. 티글랏빌레셀의 연대기는 유다왕 아하스가 어떠한 조공을 바쳤는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모든 길을 정복하면서 어떻게 시리아를 취했는가도 상세히 기록한다. 그는 시리아 왕 르신이 어떻게 도망쳤으며 어떻게 그의 부하들에게 유린당하고 죽는지도 말해주며, 또한 베가가 어떻게 암살당했는가도 보이는데 "그들은 그들의 왕 베가를 타도했다. 그래서 나는 호세아를 그들의 왕으로 세웠다"라고 한다. 이 기록은 왕하 15:30 절과도 일치한다. (cf. J. Finegan, Light from the Ancient Past, Pri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N.J. 1959, P.207)

  

☞ 조공드릴 내역을 보고하는 므나헴: 티글랏 빌레셀 3세의 침공을 받은 므나헴이 조공 드릴 내역을 보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조각품에서 당시의 문화를 보게된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므나헴이고 우측의 두 사람은 므나헴이 보고할 내용을 기록할 앗수르의 관료들인데, 흙으로된 서판을 들고있는 한 사람은 서기관이고 두루마리를 들고있는 다른 한 사람은 아마도 전략가인 듯 하다. (David and Pat Alexander, The Lion Handbook the Bible, Oxford, Lion publishing, 1992, P.278; Julian Reade, Assyrian Sculpture, British Museum, ISBN 0-7141-2020-0, P.35)

  

☞ 베가의 굴욕: 티글랏 빌레셀 3세의 Room에서 베가가 불에게 절을 하면서 굴욕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우측 벽에는 당시의 전쟁의 참상을 벽화로 그려놓았는데, 부상한 병사들이 쓰러지는 그림과 그들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창자를 독수리가 물고 있는 그림도 볼 수 있다.

  

니느웨실: 산혜립의 연대기는 거의 71개의 방으로 된 궁전 벽을 연결한 돌에 새긴 그림과 약간의 해설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니느웨에서 발굴되었다. 이 연대기는 아주 심하게 그슬려 있는데 그것은 니느웨가 불로써 파괴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훔 2:13절의 예언한 바이다. 바벨론(나보폴러살 = 느브갓네살의 부친)이 니느웨를 취했을 때, 그들은 성에 불을 지르고 코세르강 (Khoser River)으로 궁전을 홍수나게 하였으므로 원래 그 궁전은 마른 벽돌로 되었으나 결국 산산이 무너지고 용해되었다. 이 연대기 원문은 산혜립이 예루살렘을 취하기 위해 세운 전략을 보여준다. 그 원문은 "나의 멍에 (조공 바치던 것)를 벗어버린 유대 왕 히스기야 때문에 나는 사다리와 무수한 공격용 장비와 땅굴 파기와 터널... 등등의 방법으로 히스기야가 세운 46개의 도시를 점령했다. 200,150명을 포로로 잡고 말, 소, 양 등등을 무수히 빼앗았다. 히스기야는 마치 새장의 새와 같이 예루살렘에 갇혔다. 나는 히스기야가 보낸 은, 금, 보석, 상아 등등과 그의 딸들과 하렘 (한 남자를 둘러싸고 따르는 여자들)과 남녀 음악가들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산혜립은 유다의 46개 도시 중에서 라기스까지를 점령하고 피괴시킨 후에 예루살렘도 격파하기 위해 군대 장관을 보내어 선전포고를 했으나. 그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이사야는 구원의 메시지를 주었다(왕하 18-19장, 대하 32장, 사 36-37장 참조). 그리하여 산혜립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기 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앗수르 진영의 185,000명을 죽임으로 그들은 흩어졌다(왕하 19:35-36).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들이 패한 내용은 그들의 연대기 어디에도 전혀 언급이 없다. 한편 J.D Douglas는 이 "여호와의 사자"라는 표현을, 고대 그리스 사학자 Herodotus의 책 II. P.141에서는 "밤에 많은 들쥐의 떼들이 나타나서 활과 화살들을 다 씹어버리고 그들의 방패의 가죽 줄들을 다 쏠아버렸다... 다음...아침 그들이 싸움을 시작했으나 무기가 없음으로 패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전한다. (P. M. Masters, A tour of biblical evidence in British Museum, London, Sword & Trowel, 1983, P. 6; J.D. Douglas (ed.) The New Bible Die, (I.V.F.), 1978, P.1159)
 

☞ 사르곤 2세실: 이제 우리는 사르곤 2세Room에서 그의 조상을 보게 된다. 우측벽면에 새겨져 있는 조상은 Khorsabad 궁으로부터 온 것인데, 조상을 보면 왕이 왼쪽에서 고관을 영접하고 있는데 그는 아마도 왕의 아들인 "왕관을 쓴 산헤립"인 것 같다. (사르곤은 모세와 같이 상자에서 건지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Writing Room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사르곤 2세 때에 망한다. 이를 좀 더 역사적으로 보면 불이 죽은 후 살만에셀 5세가 5년간 통치했는데, 왕하 17:1-6은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요크의 살만에셀 5세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얼마 후 호세아는 조공 바치기를 중단하고 이집트왕 '소'에게 도움을 청하여 앗수르를 저항했다. 그러자 살만에셀 5세가 다시 들어와 호세아를 사로잡아 그를 감옥에 가두고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3년 만에 멸망시켰다. 사마리아가 이 처럼 3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여로보암이 9.6m의 두께의 2중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사마리아가 함락될 때에는 이미 살만에셀 5세가 죽고 사르곤 2세 가 대를 이은 후였다. 따라서 사마리아의 함락은 사르곤 2세의 업적으로 남게 되었다. (P. M. Masters, A tour of biblical evidence in British Museum, London, Sword & Trowel, 1983, P.5) ​

  

☞ 사르곤 2세의 연대기: 이 연대기는 사마리아가 공격을 받았던 사실과 함락의 사실에 대해 "나는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정복했으며 원주민 27290명을 끌고 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왕하17:6, 24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리고 나중에 볼 Writing Room에 있는 니므롯 프리즘 Ⅳ (Nimrud Prism Ⅳ)는 어떻게 사르곤이 이스라엘 마차 200대를 그의 자부대를 위해 이용했는지와 다른 나라로부터 데려온 사람들과 더불어 어떻게 사마리아를 재건했는가를 보인다. (P. M. Masters, A tour of biblical evidence in British Museum, London, Sword & Trowel, 1983, P.5). ​한편 성경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형편을 호세아서에서 잘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호세아 7:11을 보면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이집트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 도다" 사르곤 2세를 이어 왕이 된 산혜립은 보다 정벌 정책을 폈다. 그는 701BC에 유다를 침공했다. 이 때 이사야가 선지자로 있었고, 히스기야가 왕이었다. 산혜립이 침공한 이유는 왕하 18:2-8에서 보인다.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거절했기 때문에 산혜립은 화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왕하 18:13-15 참조) 유다가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게 된 것은 이미 보았듯이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히스기야의 부친 아하스가 왕위에 있을 때 유다를 침공해 왔으므로(왕하 16:5) 앗수르 왕 티글랏 빌레셀에게 아하스가 도움을 청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즉위하자 조공 드리는 것을 중단했던 것이다. 산혜립의 침공으로 유다는 일대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사자를 "라기스"로 보내어 조공을 드리며 용서를 빌었다. 산혜립은 그 어마어마한 조공을 받은 후 돌아서지 않고 예루살렘을 격파하려 했다. 니느웨실에 있는 산혜립의 연대기와 Writing Room에 있는 테일러 프리즘(Taylor Prism)에서도 이러한 내용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힘입고 예루살렘을 방어하게 된다.

 

※ 참고: "사르곤"에 대해서는 사 20:1에서만 언급된 이름이었다. 그러나 1843년에 Khorsabad(코르사받)에 서 그의 궁이 발견됨으로 사르곤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사 20:1에서는 사르곤이 그의 군대장관 을 아스돗(Ashdod)에 보내어 아스돗을 치라고 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사르곤의 역대기는 말하기를 "아수리(Azuri), 아스돗의 왕은 조공을 내지 않고 반역을 꾀하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보내어 포위, 공격하고 그 도시를 정복했고... 그들은 나의 멍에를 메었다"고 한다. 또한 대하 33: 1-25절을 보면 므낫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의 사실이 에살핫돈(Esarhaddon = 산혜립의 후계자)의 역대기에서 발견된다. 그는 므낫세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를 포로로 잡아갔는가를 보이는데 그 내용은 성경과 일치한다.

  

☞ 라기스 Room: 우리는 라기스실에서 산혜립이 유다를 어떻게 공격했는가를 볼 수 있다. 산혜림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라기스를 정복해야 했다. 따라서 라기스는 가장 격전지가 되었다. 라기스를 함락시킨 후 산혜립은 히스기야에게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니느웨에서 발굴된 "라기스실"은 산혜립의 야만적이고 공포스런 공격전을 아주 생생히 보도록 해 놓았다. 이 벽화는 라기스 포위 공격을 묘사해 주고 있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을 수 있다. 투석자들이 돌격부대를 따르고 그들의 앞에는 궁수들이 있고 그리고 돌격대원들이 있다. 공격용 무기들이 토성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고, 그 무기들은 방패로 가려진 아래에서 쏘고 있으며 그 무기들은 벽의 높이를 줄이기 위해서 던져지기도 한다. 이 벽화는 왼쪽은 맹렬한 전투를, 오른쪽은 그 결과를 보인다. 마차 한 대와 다른 장비들은 수많은 죄수들과 더불어 성 밖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고 죄수들의 약간은 심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화랑의 벽 끝에는 산혜립이 휴대용 왕좌에 앉아서 항복을 받고 있다. 그리고 명판에는 "앗수르 왕 대왕 산혜립은 라기스의 전리품이 그의 앞을 지나갈 동안 앉아 있다"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히스기야의 조공이다. 산혜립 뒤에 있는 사람들은 파리채를 들고 있고, 왕의 얼굴을 "비문화적 야만 행위자"에 의해 파손 되었다. 벽장에는 라기스 발굴 시에 발견된 당시 무기였던 투석기의 돌, 화살촉 등이 있다. 8면 프리즘은 앗수르의 전략 5 가지와 라기스의 잡힘이 기록되어 있다. Julian Reade, Assyrian Sculpture, British Museum, ISBN 0-7141-2020-0, PP.44-46; P. M. Masters, A tour of biblical evidence in British Museum, London, Sword & Trowel, 1983, PP.6-8; A. R. Millard, Treasures from bille time, England, Lion Publishing Plc, 1985, PP.121-125 ​​)​

 

참고: 당시의 물매는 활보다 성능이 우세하였다는 사실을 라기스실의 벽회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말자. 또한 다윗의 물맷돌의 크기는 어느 정도 였을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놓치지 말자.

 

☞ 히스기야의 수로: 우리는 이미 언급한 히스기야의 터널에 관한 명각(비명)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사본이고 원본을 이스탄불에 있다. 이것은 앗수르왕 산혜립이 유다를 침입했을 때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허둥지둥 이 터널을 팠는데 기혼(실로암) 샘물을 예루살렘 도시로 공급시키기 위해서 였다. (참고 왕하 20:20, 대하 32:3-4,30). 이 터널은 701BC에 만들어졌으며, 길이 1777피트(약 533m) 높이가 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인 6피트(1.8m)였는데 이것을 양쪽에서 두 팀이 파서(암반을 쪼아서) 만들었으며, 두 팀이 마주 치는 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문이 1800년에 발굴되었는데 그 기록 내용은 "... 이것은 파서 뚫은 그 터널의 길이이다... 뚫어야 할 6규빗이 남았을 때 상대방 쪽에서 동료들 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 터널이 뚫리면서 동료들이 각각 마주쳤고 괭이와 괭이도 마주쳤다. 1,200규빗을 저수할 수 있는 샘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사역병들의 머리 위로 바위의 높이는 100규빗이었다... 등등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비문도 성경의 내용을 확증해 준다.

  

☞ 사자 사냥에 관하여: 앗수르 왕들은 사자 사냥을 즐기며 사자를 사냥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최강이라는 사실을 피력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려놓은 벽화를 통해 그들이 사냥하던 장면을 볼 수 있다.

  

사해사본: 쿰란 사본이라고도 한다. 이 사본의 발견 이야기는 이렇다. 1946-47년경의 겨울 어느 오후에 3명의 양치기가 양을 치다가 한 명이 우연히 굴을 발견하고 그 굴이 얼마 큰가를 알아보려고 그 속으로 돌을 던졌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관심을 가지고 살피다가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굴을 발견한 첫날에 그들이 굴을 살펴볼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마침 태양이 지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2-3일 후에 그들 중의 하나였던 무하메드(Muhammed)는 그 굴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의 사촌이 가끔 보물과 금을 굴속에서 찾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하메드는 그 굴속에서 많은 빈 항아리와 무엇이 들어있는 두 개의 항아리를 보았는데 그 속에는 가죽으로 된 두루마리와 천으로 싸여있는 두 개의 bundles가 들어있었다. 무하메드에게는 보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하메드는 그것을 다 른 친구들에게 보이려고 가지고 나왔다. 그래서 친구들이 bundles를 열었을 때 다른 두 개의 가죽 두루마리가 더 나왔다. 이들 두루마리는 그들의 천막 속에 수주일 방치되었다가 베들레헴에 있는 장사하는 친구에게로 가져갔다.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시리아 정교회 기독교인의 옷감을 파는 상인이 이것을 보고는 그 샘플을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교회의 감독(The head of his church)에게로 가져가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그 두루마리들은 24($100정도)에 팔렸고 두 번째로 굴에서 가져온 다른 물품들도 고물 수집상에게 7($28)에 팔았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1947년까지 히브리 대학에 비치되었다. 그후 1954년에 이것들은 미국으로 팔려갔는데 그 가치는 무려 $250,000였다. 지금은 이것들이 잘 편집되어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본의 발굴로 현재의 성경이 변경되지 않았음 을 확인했다.

  

 

★★★ 이집트 Room ★★★

  

☞ 바로의 석좌상: 이집트관 입구에 좌우로 바로의 석좌상이 있는데, 이들의 뒷머리는 모두 독사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의 이집트는 뱀을 최고의 신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출애굽을 시도할 모세에게 지팡이로 뱀을 만들도록 했고, 나중에는 술객들이 만든 뱀을 모세가 만든 뱀이 잡아먹도록 하는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신이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집트 관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바로 상'에는 뱀들이 새겨져 있다.)

  

☞ 왕들의 계보판: 우선 애굽 역대 왕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거기에는 우리의 낯에 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그것들을 보면서 '출애굽은 애굽의 몇 번째 왕조 때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전기설로 힉소스 왕조 때(1446년)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기설로 라암세스 2세 때(1229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간단히 살핀다면,

  

1) 전기 때라고 하는 견해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등용될 때가 힉소스(Hyksos)왕조 때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힉소스 왕조의 시작은 1730BC경에 셈계통의 아시아인들이 애굽으로 이주해와서 왕조를 세우게 됨으로 시작되었는데, 후에 아시아인인 요셉이 등용되었을 때 동일 계통인 요셉은 많은 호감을 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애굽의 보수세력들이 다시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되는데, 제18 왕조의 시조인 아모세(Ahmose: 1584-1560BC)는 힉소스 계통을 팔레스틴 부근으로까지 쫓아내었다. 그리고는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요셉의 후예들은 말살시키려고 신생아를 죽이게 했고, 그렇게 시작된 '학정'으로 인해 '피리밋'이 만들어 졌으며, 그런 과정에서 출애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2) 위의 견해와는 반대로, 출애굽 연대를 라암세스 2세 시대로 보는데, 그 이유는 라암셋에 실제로 라암셋 2세의 싸인이 세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라암셋을 라암셋 2세가 건축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을 당하면서 건축했던 '비돔과 라암셋'이 바로 이 것과 동일한 건축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라암셋을 건축하면서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했고,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짓음을 들으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 하나만의 싸인으로는 그것이 라암세스 2세 시대에 만들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즉, 이 라암셋은 수백년을 걸쳐 건축되어 왔기에 라암셋 2세 때에도 일부가 건축되었고 라암셋은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암셋을 건축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은 그 보다 훨씬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한 가지 더 참고할 점: 출애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하던 그 전후의 애굽 왕조와 그 계보를 간단히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그 당시의 애굽 왕조와 계보는 "... 힉소스 (Hyksos) 왕조(마네토'Manetho'는 이 왕조가 아마 15, 16왕조였을 것이라고 한다.)→17대 왕조...→ 카모세(Kamose = 17대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으며 18대 왕조의 시조인 아모세(Amose)의 형이었다. 그는 이미 힉소스 왕조로부터 많은 애굽 땅을 되찾았다.)→ 18대 왕조의 시조 아모세(Ahmose, 1584-1560)→ 아멘호텝 I(Amenhotep I, 1560-1539)→ 투트모세 I(Thutmose I, 1539-1514)→ 투트모세 II(Thutmose II, 1514-1504 = 투트모세 I의 사위요, 모세의 양모인 하셑수트의 남편임)→ 투트모세 III(Thutmose III, 1504-1448 = 투트모세 II가 얻은 후처에서 낳은 아들. 즉 투트모세 II는 하셒수트와의 사이에서 딸 네프루네를 남기고 후처를 얻어서 투트모세 III세를 낳았다. 그러므로 하셒수트는 투트모세 III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투트모세 II는 투트모세 III세가 10세쯤 되었을 때 죽었다. 그래서 투트모세 3세가 즉위하였지만 실제로는 하셒수트가 섭정을 하게되었다. 이 때 모세의 나이는 22세 정도였다. 그러므로 당시 22의 나이였던 모세가 실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하셒수트의 마음은 모세에게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모세가 애굽의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모세와 투트모세 3세 사이는 라이벌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이 세상 영화를 거절했다고 한다(히11:24)}→ 아멘호텝 II(Amenhotep II, 1448-1424? =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 대결했던 왕)→ 투트모세 IV​ 아멘호피스(아멘호텝) III(Amenhopis III, ?1417-1378?)→ ... 람세스 II(Ramses II, 1304-1238)... 등으로 이어진다.

  

☞ 참고사항: 모세와 라이벌이었던 투트모세 3세는 장성하여 여러 가지 공적을 남겼다. 그는 북방 테베(Thebes)까지 정복했으며, 라(Ra) 신을 섬기는 북방 중심지였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 "헬리오폴리스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붉은 화강암 방첨탑(Obelisk)을 2개 세웠는데 현재 그 방첨탑들은 하나는 뉴욕 시의 센트럴 공원에, 다른 하나는 런던의 템즈 강 제방에 세워져 있다.

  

☞ 로제타스톤: 이 돌은 나일강 유역에서 몇 킬로 떨어진 '로제타(Rosetta)에서 발굴되었기에 그 발굴지역 이름을 따서 "로제타스톤"이라고 하였다. 이 돌의 발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그냥 이 돌이 땅에 누워 있었던 것을 나폴레옹 군대가 발굴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주 오래된 프랑스군인 진영의 벽에서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그 담을 헐고 길을 내라'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그 벽을 헐기 전에 이 돌을 보고 중요한 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상부에 보고함으로 이루어졌다 고 한다. 이 돌이 세인의 관심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동일 내용이 2개의 언어와 3가지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위에서부터 이집트 상형문자, 민간문자 그리고 그리스어). 이 돌은 1802년 2월에 영국으로 옮겨졌지만, 이 돌에 새겨진 글씨의 해독은 프랑스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이 돌에 새겨진 내용은 196년경에 멤피스의 신관이 선포한 일상적인 법령(톨레미 5세의 법령 : a decree of king Ptolemy V)으로 별로 큰 의미가 없지만, 이 내용이 해독됨으로 고대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열쇠를 쥘 수 있었다. 이 돌에 새겨진 톨레미(Ptolemy)와 클레오파트라(Cleopatra), 그리고 람세스(Ramesses) 등의 글자가 이 문자를 푸는 실마리가 되었다.

  

☞ 바로들의 석상들: 이집트 관에는 여러 바로들의 석상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보면서 ①그들은 한결같이 뱀신을 섬겼음을 볼 수 있고, ②당시의 세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볼 수 있으나, ③인간의 영예는 길지 못하다는 사실도 곁들여 볼 수 있다.

  

☞ 아멘호피스(Amenhopis III)의 두상과 팔: 모세가 출애굽 할 때의 왕은 이 왕의 아버지였던 아멘호텝 II(Amenhotep II)였는데, 우리는 그 왕의 아들이었던 아멘호피스 3세의 석상을 보면서 당시의 바로의 영화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과히 짐작케 된다. 그러나 모세는 이런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들과 고난받기를 즐겨했으니 이는 상주시는 이를 바라봄이었다.

  

☞ 금박 입힌 미이라: 이 미이라는 람세스 왕의 여사제였던 헤누트메히트이다. 그녀는 아문이라고 불리우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임무를 수행하며 람세스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당시의 영화를 몸에 치장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 람세스 2세: 후기 출애굽 학자들에 의하면 이 왕 때에 출애굽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왕은 생색내기를 좋아하여 선조들이 이룬 업적에 자기의 싸인을 새겨 넣음으로 후대 역사가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일으키게 하기도 했다. 이 왕은 15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무려 100세 가까이 장수했다고 한다. 선왕 때부터 쌓아 오던 국고성 라암셋을 이 왕 때에 완성한 것으로 본다. 이 석상의 우측 어깨 쪽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은 프랑스 인들이 이 석상을 옮기려고 시도하면서 뚫었지만 이동에 실패했다.

  

☞ 애굽 신의 형상들: 애굽에서는 여러 신들을 섬기며 그 형상을 만들었는데 그러한 신들의 형상들을 볼 수 있다. 출애굽시 개구리 재앙이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섬기는 개구리 신이 그들을 이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층 전시관 (우측: 그리스와 로마 관, 좌측: 이집트의 미이라 관, 정면: 메소보타미아 관)

  

☞ 하솔(Hazor = Tellel Qedah임)의 항아리: 이제 우리는 고대 팔레스틴 실을 보게 되는데 그 입구 우측에는 성경에서 언급되는 하솔(Hazor = Tellel Qedah임)로부터 가져온 아주 큰 항아리가 있다. (하솔은 갈릴리 호수의 윗쪽, 게데스 보다는 아래쪽에 있음) 이 항아리는 1300BC 경에(아니면 그 전에) 가나안인 도공이 만든 것이다. 하솔의 발굴은 1950년 말부터 있었는데 약 1280-1230BC (혹은 그보다 더 이른) 도자기류에 의해 거의 둘러싸인 집들의 잔재가 거기서 발굴됐다. 이러한 잔재의 흔적들은 격전이 있었음을 보이는데 이 흔적들은 성경이 말하는 1400BC경의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침공한 것과, 1235BC에 사사들이 하솔을 파괴시킨 것에서 나타난 것으로 본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침공했으나 그 땅을 점령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가나안 잔류민들은 적절한 때에 다시 하솔로 모여 전열을 가다듬고 강력한 하솔의 요새를 만든 후 이스라엘을 역공해 20년간 이스라엘을 억압했다. 그런 후 드보라와 바락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면서 하솔을 멸망시켰다. 이에 대한 참고는 수 11:10-11, 삿 4:-5:에 있다. 하솔의 출토품은 성경의 가나안 정복 연대와 사사들의 하솔 정복 연대가 확실함을 입증해 준다.

  

☞ 아마르나 서판들: 우리는 아마르나 서판들 (The Amarna letters)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1887년에 이집트의 el-Amarna에서 발굴된 수백점의 고대 문서들의 일부이다. 이 문서들은 1400-1367BC 사이에 진흙 판에 쓰여진 것으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당시에 팔레스틴의 가나안 도시의 공무원들과 소국왕들이 바로들 (Pharaohs)에게 도움을 청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들 이다. 이 편지들은 바벨론어로 쓰였으며 그들 중의 많은 내용이 "합비루"에 의해 가나안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리면서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편지를 받은 아마르나에 거하는 아멘호테Ⅳ는 그들에게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팔레스틴이 비록 이집트의 일부에 예속되어 있지만, 크게 흥미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성경에서 산출해낸 날짜로는 여호수아가 1405BC에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아마르나 문서들은 1400-1367BC의 것이므로 이 문서들은 호수아(히브리인)가 가나안을 향해 오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보낸 것들로는 볼 수 없으며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 정복 활동을 단행할 당시에 가나안 왕들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쓴 편지들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실제 편지 내용이 합비루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니 도와달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아마르나 문서들을 연구하면 당시 팔레스틴의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가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 12:9-24절을 보면 거기에는 31개 이상의 독립 국가들을 언급하는데, 이들 왕들이 바로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도움을 얻지 못한 그들은 합비루에 의해 거의 정복되고 남쪽의 몇 독립국만이 남게 되었다. (수1:22,23 참고) 현재 대영 박물관에는 82개의 문서가 있고, 160 점 이상은 베를린에, 60점은 카이로에 있으며 지금 전시된 것은 가장 현실적 가치가 있는 소수의 문서들이다.

  

☞ 라기스 편지들: 이것들은 1935년에 라기스의 정문 곁에 있던 붕괴된 초소 안에서 발견되었다. 21 통의 편지들은 사금파리 도자기에 검은 잉크로 달라붙은 글씨로 쓰여졌다. 이 편지의 내용 중에는 유대가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았을 때, 그 상황이 위급했던 것을 보고하는 내용과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계하는 내용과,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내용도 보인다. 느부갓네살의 침공 보고는 군대 전초 부대장이었거나 수비대장이었던 호사이야(Hoshaiah)가 라기스의 통치자 야오스에게 쓴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 34:6,7절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현재 예루살렘과 라기스와 아세라만 무사히 남아 있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라기스 편지에서는 아세라로부터 라기스로 보내기로 약속된 "불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는 아세라도 이미 함락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따라서 라기스 편지는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편지를 보낸 다음에 기록된 것임이 확실하다.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렘 38:4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예레미야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 수 있다"고 예언한 것에 대해 방백들이 못마땅해 했기 때문에 왕에게 예레미야를 고발한 것이다. 아무튼 라기스의 편지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정확히 성취되었다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느부갓네살의 침공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 셉나의 묘비 명각: 이사야에 의해 비난 받았던 셉나 (Shebna)라는 귀족의 무덤 비명을 볼 수 있다. 돌로 된 석판에 새겨진 이 명각은 예루살렘 근처에서 100년 전에 발견되었으나 겨우 1950년대에 해석되었다. 이것은 단단한 암반의 언덕을 깎아서 만든 묘실의 문 위쪽에서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이 집은 야후(Yahu)의 집이다. 거기에는 은이나 금이나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그와 살해된 그의 아내의 뼈만 있다. 이것을 여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Yahu는 Shebanyahu로서 주로 Shebna(셉나)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히스기야 시대인 701BC에 재무장관으로 활동했는데, 그가 이러한 무덤을 화려하게 준비한 것 때문에 이사야로부터 야단을 맞은 것 같다. 그는 그를 자랑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존경과 세속적 안전을 추구하려다가 국고를 축내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이사야 22:15-17 절과 20절에 있다. 한편 이 일로 셉나는 공직으로부터 물러났으며, 그 후임에 엘리아김의 아들 힐기야가 올랐다. 그 즈음에 산혜립은 유대를 침공했고, 이사야의 예언대로 셉나는 앗수르로 속박되어 끌려갔고 그러므로 그의 고급스러운 무덤은 명각만 남긴 채 뻔뻔스럽게 비어 있게 되었다. 실제로 셉나는 그 무덤에 묻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아합의 상아궁: 우리는 또 아합의 상아궁 (Ahab's Ivories)의 잔재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왕상 22:39 절에서 언급한 성경과 일치한다. "아합의 남은 행적은...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 아합의 상아궁은 칼로 새겨 상감 세공한 상아 장식띠와 문장을 넣어 꾸민 상아 장식이 궁전을 완전히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벽들과 가구 장식까지도 상아로 꾸며졌다. 이러한 상아 장식은 두로로부터 온 페니키아 공주였던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성경 아모스 6:3에서는 "상아 상에 눕는 자들이 흉한 날을 보리라"고 했는데 이 예언대로 아합과 그의 가문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우르의 문화와 아브라함: 이제 우리는 우르에 관한 것들을 보게 된다. 우르의 발굴물은 1922-1934년에 레오나드 울레이 (Leonard Woolley)에 의해서 해석되었다. 우르의 역사는 2500BC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브라함은 22세기BC 기간에 우르에서 살았다. 우르는 달신을 섬겼으며, 찬란한 생활 문화 속에서 도시는 2층 양옥집을 가지고 있었고, 하수도 시설과 기록된 계약서나 돈, 영수증 등등의 활용과 법에 기초한 광고 시설도 있었다. 우르의 발굴은 1854년에 있었다. 전시된 그림에서 성소로 보이는 것은 데라가 제사하던 장소의 일종으로 보인다. 또한 우리는 왕족의 행렬 혹 부자 가족의 행렬을 보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긴 여행을 상상하도록 한다. 그리고 "염소상"(statue)은 "이삭의 제물"과 관계있는 수풀에 걸렸던 수양을 생각하도록 한다. 또 방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빗물받이 관과 달걀 모양으로 된 유리컵 은 명패로부터 번역된 유리 그릇 제조법에 따라 최근에 만든 것이다. 그리고 여왕의 하프 (Harp), 왕족 썰매, 많은 옷감 등을 볼 수 있다. 2500BC 당시에, 이렇게 발달된 문화생활을 누렸던 이브라함이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멀고 험한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기란 쉬웠을 리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우르의 달신 도시(The city of the moon-god): 우르에는 달신을 섬기는 성전(The temple of the moon-god)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에 관한 기록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약 400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층층이 쌓아올려 맨 꼭대기에 신전(The house of the god on top)을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이 신전을 보면서 바벨탑을 생각하게 된다.

  

☞ 출애굽시의 생활 문화들: 우리는 고대 이집트에서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을 보면서 성경의 내용들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는 벽돌(성경에서 벽돌을 구웠다는 것처럼), 의상, 그 당시의 음식(food) 등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모세 시대와 출애굽시대에 쓰여진 파피루스를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의학적 부분을 다루는 것과 꿈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인데,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 문서실 (The Room of Writing) ★★★

  

☞ 바벨론의 역대기들: 616-539BC까지의 갈대아 왕들의 역대기들은 성경 내용을 실증해 준다. 대영 박물관 번호 21901인 나보플라사르(Nabopolassar)역대기는 616-609BC동안 어떻게 바벨론을 건국했고 어떻게 앗수르 왕국이 붕괴되었으며 수도 니느웨가 멸망했는가를 보인다. 이 역대기는 바벨론이 그의 동맹국들과 함께 612BC에 어떻게 니느웨를 공격했는가를 말하는데, 「아카드왕(The King of Akkad = 나보폴라살의 별명임)은 그의 군대를 소집하였고... 움만만다(메데 혹은 scythians의 왕임)는 티그리스 강둑을 건너고 니느웨를 향해 진격했고 거민을 타파하고.... 포로들을 끌고 갔으며 도시와 성전은 황폐됐다.」고 적고 있다. 그들은 마치 나훔의 예언처럼 불을 질러서 도시를 태웠고, 강물을 끌어들여 홍수를 맞게 하여 성이 황폐되게 했다. (참고: 바벨론과 메데는 연합해서 앗수르를 공격했다). (P. M. Masters, A tour of biblical evidience in British Museum, London, Sword & Trowel, 1983, P.15) 이 역대기의 다른 한 쪽에는 요시야 왕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왕하 23:29와 대하35:20-24와 일치한다. 신흥 바벨론과 메데 연합군에 의한 앗수르 멸망(612BC,) 후, 앗수르의 잔류민들은 앗수르의 서북부 도성인 하란으로 모여서 다시 궐기하여 두 차례에 걸쳐 신흥 바벨론을 대항하여 화란 을 탈환하려 하였다. 이때, 이집트의 바로느고는 앗수르가 하란을 바벨론으로부터 재탈환 하는 것을 도우려고 2차례나 시도했는데(신흥 바벨론을 꺾어서 진출을 억제하려고) ① 바벨론 왕 나보폴라사르가 알고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앗수르로 진군해 와서 애굽의 바로느고 군대를 물리쳤고, (이때가 609 B.C.였으며 이때 요시야가 애굽의 바로느고 군대와 맞서다가 전사했음 = 당시 요시야는 반 앗수르적인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앗수르가 망하는 것은 독립을 위하여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으로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려는 바로느고를 대항하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했다. 그런데 왕하23: 29, 30과 대하35: 23, 24를 비교하면 요시야가 죽은 곳이 다르게 설명된다. 후자가 요시야의 죽음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은 대하 34: 28의 예언의 성취를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즉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대로 그는 다가오는 유다의 재앙을 보기에 앞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요시야의 최후를 자세히 밝힌 것이다). ② 다른 한번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605BC에 다시 바로느고를 저지했고, 그 갈그미스 전투 후 유대에까지 들어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많은 포로를 잡아가게 되는데 그 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끌려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보폴라사르 역대기와 느부갓네살 역대기는 자세하게 언급한다. (참고: 우리 성경의 왕하 23: 29의 "치고자 하여"의 원문 은 "against"뜻만이 아니라 "위하여"(for, on behalf)의 뜻도 된다. 대영 박물관에 있는 바벨론 흙판 연대기(Babylonian clay tablets, 고유번호 21946)의 본문에는 "위하여"라고 되어있다. 어느 해석을 취하느냐에 따라 이해가 달라지는데, "위하여"로 수정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다른 석판(고유번호 22047)에서도 애굽이 바벨론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또 고유번호 21946에는 애굽이 갈그미스에서 605BC에 바벨론 군대에 망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 느부갓네살의 (서판)역대기: 느부갓네살 연대기는 갈그미스 전투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에 관한 번역은 1956년에 D. J Wiseman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연대기의 박물관 번호는 21946번이다. 이 역대기의 내용은 「Akkad 왕 (Nabopolassar) 제 21년에 그의 장남이자 왕위를 승계한 느부갓네살은 군대 소집을 하고 이집트 군대를 대항하기 위해 갈그미스로 진군했고... 바벨론 군대는 그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그리고 하티 (Hatti)나라의 모든 지역을 정복했다」라고 한다. 여기서 "하티"란 팔레스틴을 포함하는 것이며 느부갓네살이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1차 침공은 느부갓네살이 이집트를 격퇴하기 위해 갈그미스에 왔다가 아예 유대까지 정복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1차 침공을 받았을 때 유대의 왕은 "여호야김"이었다. 역대기의 내용은 계속 말하기를 "597BC에 그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했으며, 조공을 받고, 보물을 노략했으며, '여호야긴'을 잡아가고 또한 10,000명 정도의 다른 포로들과 짐승들도 끌고 갔으며 '시드기야'를 꼭두각시 왕으로 세운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이 서판은 여호야긴이 포로된 후 바벨론에서 그의 5아들과 함께 월급을 공급받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592BC 날짜로 기름 영수증 3장도 발급했다고 한다.

  

성경은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침공에 대해 "여호야김이 11년간 통치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3개월 통치할 때 침공했다"고 하고 있으니 여호야김 4년에 1차 침공이 있었으므로(렘46::2) 그 때가 605BC이고 2차 침공은 약 8년 후인 597BC에 있었으므로 이 연대기와 성경적 연대는 정확히 일치한다. 예루살렘의 세 번째 침공에 대해서는 바벨론 연대기의 확증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595-556BC의 연대기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번째 침공에 대한 사실을 라기스의 편지에서 확인했다. 즉 시드기야가 왕위에 있을 때 수비대장 호사이야가 라기스의 군대 통치자인 야오스에게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목전에 왔음을 긴급히 알리는 내용이 라기스 편지에 기록되어있다. 느부갓네살이 3차 침공을 시도한 이유는 시드기야가 그의 대군주인 느부갓네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수년간 배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586BC에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유대는 70년간 포로 기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참고 대하 36:13, 왕하 24:20) 성경은 시드기야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를 왕하 24:1-7절에서 보인다.

  

☞ 나보니두스의 (서판)역대기(고유번호 35382): 우리는 Nabonidus 연대기를 통해 바벨론이 539BC에 멸망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다니엘 5장 30절은 갈대아왕 벨사살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보이는데, 이것은 다니엘이 이미 예언한대로 539BC에 메데(Medes)가 바벨론을 점령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벨사살이 살해되기 전에 그는 술을 마시다가 맞은 편 벽에 손가락이 나와서 글을 쓰는 것을 보고 그 뜻을 푸는 자에게 바벨론의 셋째 치리자가 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따라서 다니엘이 그것을 해석해 주자 다니엘을 그 자리로 세웠다. (참고 단 5:7,29) 그런데 역사가들은 성경이 말하는 벨사살 왕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 (Nabonidus)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벨사살이란 이름은 다니엘서 외에는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450BC에 바벨론의 역사를 기록한 그리스의 역사학자 Herodotus 조차도 벨사살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사가들은 다니엘서는 순전한 우화라고 취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문은 바벨론 서판들에 의해 풀리기 시작했다. 이 서판은, 보니두스(Nabonidus)의 557-539BC까지의 통치기간을 보여주는데, 한 부분을 보면 그가 후기 10년간은 Tema에서 거했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왕관을 물러받은 왕자(이 왕자의 이름은 Belshar-usur로 나타난다. 이유는 몰라도 벨사살은 공식적인 제위식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서의 왕이었다)가 바벨론 궁을 지키며 바벨론을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539BC에 바벨론이 멸망되었다는 많은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일부를 소개하면 "왕이 Tema 시에 있었고 조신들 (courtiers)인 그 왕의 아들 (벨사살을 지칭함)과 군대는 바벨론에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은 바벨론의 실제 통치는 벨사살이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다 단 5:7절의 "세 번째 치리자로 세워 주겠다"는 약속을 연결시켜 볼 때, 왜 다니엘이 그 왕국에서 셋째 서열이어야 하는 가를 이해하게 된다. 즉 부왕 나보니두스가 첫째요, 실권을 행하는 벨사살이 둘째요, 다니엘이 그 다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니엘이 말하는 벨사살에 대한 기록은 사실임이 입증됐다. 이 역대기의 내용을 좀 더 본다면 "... 바벨론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들여왔다.... Cyrus(고레스 왕, 이는 메데와 파사를 일컬음)가 Opis에서 바벨론 부대를 공격했을 때 ... 바벨론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Cyrus 군대는 전투 없이 바벨론으로 들어왔다..." 등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 바벨론 사람들이 나보니두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은 나보니두스가 떠나 있는 동안 백성들이 연례행사로 지켜오던 새해 잔치가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새해에는 왕이 제사장이 되어 국신 말둑(Marduh)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즐겼는데, 10년 정도 그 행사가 중단된 상태에서 나보니두스가 나타나서 다시 이 축제의 부활을 명하자 백성들은 그를 부적당한 통치자로 간주하고 반역하여 오히려 고레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레스는 자기를 일컬어 말둑(Marduk)의 사신이라고 하면서 말둑 신에게 경배를 무시하는 바벨론 왕을 멸하려 왔다고 했던 것이다. 벨사살은 통치권은 소유했으나 '제관'을 대행할 위치는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의식을 이행하지 못했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참고할 것은, 다니엘이 6세기 BC에,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왕국들에 대해 자세한 예언을 한 사실에 대해 비꼬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다니엘서가 이러한 사실들이 일어난 후에 기록되었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벨론 서판들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억측들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① 다니엘서 저자는, 450BC경에 그리스의 사가 Herodotus가 글을 쓸 때에도 알지 못했던 Belshazzar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니엘이 6세기 당대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벨사살을 알 수 있었겠는가! ② 다니엘서 저자는 바벨론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재건되었음을 말했는데(단 4:30) 이것에 대한 사실 확인은 최근의 바벨론 유물 발굴로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그 당대의 사람이었던 다니엘만이 이 사실을 알린 것이다.

  

☞ 창조와 홍수 설화판(바벨론 서판): 우리는 니느웨에서 나온 진흙판으로부터 창조와 홍수에 관한 전설들을 대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605BC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 판들은 1848년부터 발굴 작업을 계속하던 중 니느웨에 있는 왕실 도서실에서 발견됐다. 거기에는 "바벨론의 창조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 우화는 약 1800BC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대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서판은 1851년에 발견되었다. 이 일로 인해 성경에 대한 극도의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모세의 창조 기록과 노아 홍수 기록은 이 설화들로부터 copy해낸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내용이 많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성경은 사람이 불순종하고 범죄하기 전에는 "거룩과 전능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비해 바벨론 창조설은 열등하고 부패하고, 성을 잘내고 사악한 신들로 가 득한 다신교의 요정의 나라로 만들어졌다고 하고 있다. 또한 홍수 이야기에서도, 배를 필요로 했다는 내용을 일치하나 홍수 설화는 동물들을 태웠고, 상상의 반지인 금과 은을 취했다. 그 이유는 만약에 홍수가 만연한 세상에서 그의 가족들이 홀로 살아남는다면 꼭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홍수 후에 먼저 비둘기를, 그리고 후에 제비를 날려 보냈으나 돌아왔고, 다음에 까마귀를 날려 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홍수 후에는 서열이 정확히 드러나는 신들에게 희생을 드렸는데 음식 냄새를 맡고 신들이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성경에 기록된 창조와 홍수에 대한 이야기는 창조 설화나 홍수 설화와는 많은 유사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인류 역사의 실제적 홍수 사건에 대해 바로 듣지 못하고 구두로 전해오는 것을 들음으로써 그 내용들이 다소 변질된 기록으로 남은 것이 발견된 것이고, 모세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창조와 홍수 사건에 대해 정확히 이해함으로 창세기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기자인 모세가 수메르나 바벨론의 전설들의 원시 미완성품을 훔쳐내어 완성시켰다는 것은 억측이다. 창세기 용어들을 보라! 그 초월적 위엄과 신학과 그 용어 등은 영감된 심령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아닌가!

  

우리는 또한 744-669BC의 바벨론 역대기(박물관 번호 92502)에서 산혜립의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 왕하 19:37, 사 37:38의 진술을 확증해줌을 보게 된다. 이 연대기는 밝히기를 "티벳월 제 20일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아들이 (여기서는 단수임) 앗수르왕 산혜립을 죽였다..."라고 한다. 산혜립의 죽음은 681BC에 있었다. 성경에서는 두 아들을(왕하 19:37은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들 아르람멜렉과 사례셀이 저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아들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살해한 공모자와 살해자에 대한 견해 차이일뿐이다.

  

☞ 느부갓네살의 도장이 찍힌 벽들: 느부갓네살은 605-562BC까지 재임 중 건축에도 힘쓴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바벨론을 고대의 가장 호화스러운 도시로 만들면서 그 벽돌에다가 해설을 붙이고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직함 (titles)이 붙은 도장을 찍었고 드물게는 직접 날인을 했다. 다니엘 4:30에서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한 말에 다시 관심이 쏠린다.

  

☞ 테일러 프리즘: 722BC에 살만에셀이 죽었을 때에, 스스로 앗수르 왕이라고 선언했던 제독 사르곤 2세의 연대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722BC에 사마리아가 함락된 것을 또한 확인한다. 우리가 이미 살핀대로 사마리아가 3년간 포위되었을 때 사르곤은 그의 명성을 얻으려고 힘을 썼으며 살만에셀이 죽자, 그가 즉위하면서, 사마리아를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프리즘은 "나는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 원주민 27290명을 앗수르로 끌고 갔으며 다른 나라 사람을 대신 사마리아로 보내어 사마리아를 더 살기 좋은 나라로 재건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가하면 산혜립의 침공으로 히스기야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되었다"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 모압왕 "메샤 (Mesha)의 기념석비"로 알려진 모압왕의 "고대 기념돌" (an ancient memorial stone) 하나가 1868년에 회교 족장 한 사람의 소유물로 들어오게 됐는데 그 돌은 모압 왕 메샤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모두 39줄로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은 "나는 메샤... 모압 왕이며... 이스라엘 왕 오므리에 관해서는... 그는 오랫동안 모압에 온유함을 보였고 그의 아들(Ahab)도... 모압에 대해 온유할 것을 약속했다. 내 통치 시대에 그는 온유로 대해 주었고... 그러나 나는 그를 벗어나는데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내용은 왕하 3:4-5의 "모압 왕 메사는 목자였고, 새끼 양 100,000과 수양 10,000을 모(wool)와 함께 이스라엘에 바쳤다. 그러나 그 후에 아합이 죽자 모압 왕은 이스라엘을 다시 배반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모압은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고 섬겼으나 930BC 후에 모압은 이스라엘의 멍에를 벗어 던졌다. 그러나 모압은 그 후 다시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아 왔으며 아합이 죽던 853BC 경에 다시 이스라엘로부터 벗어났던 것이다. '모압의 비석'은 이스라엘로부터 일부 지역들을 취한 것과 저수지와 소읍의 건축에 대해서도 말한다. 여기 박물관에 있는 돌은 원본이 아니고 사본이며 원본은 루브르 (프랑스)에 있다.

  

☞ 파사(페르시아)왕 고레스(559-530BC)의 원통(Cyrus Cylinder): 이 실린더의 길이는 약 9인치이고, 거기에는 536BC에 기록된 고레스의 필적이 있다. 이 필적은 에스라 1:1-3의 내용을 확증해 준다. 에스라는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놓아주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했다..."고 하였는데, 많은 비평가들은 "6BC의 페르시야 황제는 정치적으로 약아 빠진 자들이라, 포로 된 백성을 놓아주고 종교적 자유를 선언했다는 것은 우스운 소리다"라고 하면서 에스라의 기록이 잘못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고레스 왕의 실린더가 발견된 후 그들은 더 이상 에스라의 기록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 실린더에는 고레스가 어떻게 539BC에 바벨론의 도시를 저항받지 않고 취했는가를 보이며 그 실린더 위의 기록의 끝 부분에는 외국 포로에 대한 자유와 사회적 신분을 바로 잡아 주고 그들을 고 국의 땅으로 돌아가 전통에 따라서 예배하도록 한 고레스의 정책이 있다. 즉 "바벨론 거주민에 대하여는...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안 주는 것과, 사회적 신분을 안 주는 제도를 폐지한다... 나는 그들의 무질서한 주거 생활에 안녕을 주었고 티그리스 다른 편에 있는 헌납됐던 도시들을 돌려주었다. 그 땅은 오랫동안 폐허 되어온 거룩한 땅으로... 나는 역시 이전의 원주민들을 모아서 그리로 돌려보냈다"라고 적고 있다. 한 때 성경의 역사적 기록은 불신의 뒷전에 밀려 홀로 서 있었으나 고레스의 기록이 발견됨으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확성을 확보했다. 또 우리는 다리오(522-486BC) 왕의 원통 인장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의 재건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훼방자들이 이 일을 방해하고 고레스(559-530BC)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닥사스다 I[530-522BC, 일명 캄비세스(Cambyses)]에게 이 일에 대해 금지 조서를 내리기를 바라는 상소문을 올렸고(에스라 4:7-16), 그래서 다리오(522-486BC)왕 2년 때까지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후 학개를 비롯한 사람들이 스룹바멜을 중심하여 성전 재건을 시도하자(에스라 5:1-2) 이번에는 또 다른 무리들(에스라 5:3 참고)이 다리오왕에게 성전 건축 금지 조서를 내리도록 상소하였기에 다리오는 고문서들을 살펴 고레스의 명을 확인하고는 오히려 100%의 재건 자금과 함께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렸는데, 그 조서를 내릴 때 여기에 있는 원통 인장으로 인을 찍었다. 이 원통은 굴리면서 찍히도록 사용됐다. 다리오의 도장은 그 뜻이 밝혀지지 않은 고대 페르시아어와 엘람어(Elamite)와 바벨론어로 된 명함으로 새겨져 있다.

  

※참고: 에스라서를 읽어보면 7장에서 또 다시 아닥사스다 2세(크세르크세스 = Xerxes)에게 상소문을 올리는 무리들을 보는데, 이들은 성전이 완성된 후에 성벽을 보수할 때 훼방을 놓은 무리들이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사마리아인들이 얼마나 사악했는가를 볼 수 있다. 또 우리는 그것에 이웃해 있는 Case에서 에스더 시대에 사용되었던 은 식기류들을 볼 수 있다. 또 우리가 이란 Room을 들어가면서 입구 가까이에 "타일로 된 궁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다리오에 의해서 지어진 수산궁(에스더서에서 자주 언급됨)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예술 장식은 당시 에스더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메데 파사의 왕으로 다리오는 4명이 등장하였는데, 성경에는 3명의 다리오가 나온다. 한 사람은 바벨론의 멸망 이후 (539BC)에 벨사살을 대신하여 왕이 된 다리오(키악세레스 2, Cyaxares II)​인데, 5:31에서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라고 하며 9:1에서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고 한다. 다니엘서에서 언급되는 다리오는 바로 이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메데의 공식 왕이 아니라 정복한 바벨론(갈대아) 왕으로 통치하였기에, 메데 파사 왕으로는 공식 기록되지 않는다. 다른 한 사람은 에스라서에 나오는 다리오 I세(The great king)이며,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을 중건하도록 한 왕이다(6:3)​. 그리고 12:22 에서는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고"라고 한다. 하지만 이 다리오는 다리오 II인지, III세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수산궁은 다리오 1세에 의해 지어졌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할 것은 바벨론 붕괴 후에 왕이 된 사람은 파사왕 고레스인데, 다리오는 파사와 연합한 메대의 총독(고레스의 장인이기도 함) 이었다. 따라서 실권은 고레스가 잡았으나 장인인 메대의 총독과 약 1년간에 걸쳐 쌍두체제를 유지하였다. 이는 고레스가 장인을 예우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다니엘은 벨사살을 대신하여 다리오가 왕이 되었다고 한 것은, 거국 전체를 통치하는 고레스와 더불어 다리오는 벨사살이 통치하던 지역을 관장하는 왕이었음을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우리는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을 통하여 성경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데, 출애굽 전에 양을 잡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를 좌우 설주(side-post, 혹은 door-post)인방(마쉬코프: ????? 혹은 아일: ??? / ?????는 원래 의미로는 ‘위에 걸려 있는’이란 뜻이다. 두 단어 모두 영어로는 upper door-post, 혹은 above the door, 혹은 lintel로 번역되었다.)에 발라야 했다. 그런데 문은 4모퉁이 인데 문턱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문턱은 왜 피를 바르라는 말이 없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당시 문화는 양을 잡을 때에는 문턱에 걸쳐서 잡았으므로 문턱에는 자연히 피가 묻게 되므로 문턱에 피를 바르는 이중적인 수고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그림을 비잔틴 예술이 있는 방에서 볼 수 있다.

 

그 외에 우리는 로마, 그리스관에서 예수님의 출생이 있을 때 호적령을 내렸던 아구스도(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이렇게 개명함의 흉상과 로마의 기독교 박해 황제들의 흉상, 그리고 의사 누가가 썼던 것과 유사한 의료 기구들과 가전제품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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