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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9장23-27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24.04.14)
김태규 2024-04-14 추천 0 댓글 0 조회 55
1923-27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88, 321(351), 314(511)

 

하나님으로부터 동방의 의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욥은,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시련을 당합니다.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몸까지도 견딜 수 없는 질병으로 시달립니다. 그래서 욥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시련은 계속 됩니다.

 

욥의 사랑하는 친구들이 욥을 위안하려고 왔다가 욥의 가련하고 곤고한 상태를 보고는, 위로하기는커녕, 19:3절에서 보는 것처럼 열 번이나 욥을 확대하였다고 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나 아무런 응답도 주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8절에서는 오히려 길을 막아 흑암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9절에서는 영광의 관모를 벗기셨다고 합니다.

 

10절에서는 사면으로 자기를 헐어버리셔서, 죽게 만드시고는 희망을 뽑아버리셨다고 합니다. 11절에서는 자기를 향하여 진노하시고는 원수같이 보신다고 합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의 군대가 일제히 자신을 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형제들이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여기고, 14절에서는 친척과 친지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자기 집에 머물러 사는 종들도 자신을 낯선 사람 취급을 하며,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종들에게 간청을 해야 했으며, 일가친지들도, 동네 사람들도, 욥을 업신여기며 조롱하였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버렸고, 자신의 몸은 한마디로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살아 있는데, 자신을 위문하려고 찾아온 친구들마저도 자신을 질책하니, 욥은 너무 비통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23-24절에서 보는 것처럼 <자신의 말이 책에 기록 되었으면> 좋겠고, <자신의 말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British Museum에 가면, 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런 기록은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보존됩니다. 욥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처음에는 자신의 사연이 책에 기록되기를 원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철필과 납으로 돌에 새겨져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사연과 심경을 후세 사람이라도 읽고,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죽 답답하였으면 이렇게 까지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욥이 이렇게 말하면서, 풀썩 주저앉아버린 것이 아니라, 불사조처럼 벌떡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치기를 25절에서 보는 것처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라고 아주 기막힌 고백을 하였습니다. 욥이 외친 고백 속에는 3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는, 지금 자신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처지, 막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아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알기에는>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욥이 <안다>라고 한 말은, 히브리어로는 <야다>인데, 이 말은, 단순히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확실히 아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제가 한국에 가면서 90% dark 초콜릿을 사가지고 가서 어떤 목사님께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의 아들이 dark 초콜릿을 너무 맛있게 먹으면서 이러더랍니다. <, dark 초콜릿 맛이 이런 것이구먼...> 그런데, 그 아들에게 dark 초콜릿 맛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잘 설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dark 초콜릿 맛을 압니다. 먹어 보았기 때문에,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경험적으로 무엇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은, 신념이 강해집니다. 그가 경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잘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자기가 경험한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도, 현실은 비록 죽음에 처한 상황 같을지라도, 그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있기에, 벌떡 일어서서 <내가 알기에는> 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무엇을 아는 것일까요? 욥은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라고 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라고 번역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구속자, 혹은 대속자>, 원어로는 <가알>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Redeemer 라고 하는데, <가알>이라는 말에서 <고엘>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고엘이 무엇입니까? <고엘>이란 <무르다, 변재하다>라는 뜻인데, 예를 들면, 35:19절에서 보는 것처럼,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 25:26절에서 보는 것처럼,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친족의 기업을 무르는 의무를 수행하거나, 4:5절에서 보는 것처럼 친족이 자식 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게 하는 것 등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출애굽 사건이라든지,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귀환하게 한다든지, 개인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게 한다든지, 재앙에서 벗어나게 한다든지, 죽음을 이기게 한다든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욥이,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라고 하는 말은, 비록 지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극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구속자>가 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면서, 벌떡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고백하는 이 대속자는 누구입니까?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도 부르짖고, 친구들에게도 매달려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으나,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구속하실 분이 살아계시는데, 그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25절 하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자신의 처지를 대속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주로 임하실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현재 <환난의 잿구덩이>에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죄인>이지만, 자신의 구속자가 되어 주실 분이 살아계시며, 그분께서 언젠가는 이 땅에 오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룰 것이고, 자신을 주님의 나라로 영원히 인도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욥의 고백을 보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욥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그의 영안은 밝게 열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욥을 <아브라함과 동 시대의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욥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2,100년 전의 사람이었는데, 욥은 훤히 열린 영안으로, 하나님께서 2천년 후에 세상의 구주로 보내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 미리 보고 있었으니,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고, 자신의 목숨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참혹한 상황에 있지만, 장차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벌떡 일어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치기를 <나는 안다, 나의 대속자는 살아 계신다, 그분께서는 이 땅에 서실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욥이었기에, 그는 결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오실 구속자를 바라보는 신앙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음이 터져 나오고, 때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볼멘소리로 하소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욥은, 살아계신 구속자, 그리고 언젠가는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삶과 구원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런 욥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의 연약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우리는 육체를 가진 연약한 인생들이기에, 할 수만 있으면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그냥 나가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흥되는 현장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한 비결을 예로 보면, 그들은 핍박이 와도, 환난이 와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비결은 주님 제일주의로 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늘나라 소망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할 때는, 이런 찬송이 유행하였습니다.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런데 오늘 날에는, 이런 신앙의 의지가 없기 때문에, 조금만 힘들면 막 무너집니다. 세상이 휘두르는 권력과 물질의 힘에 휘둘림을 받으면서, 나가떨어지고, 내동댕이쳐지고, 그래서 세상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향락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육신적으로는 <고달파 죽을 지경이지만>, 영안은 열려, 2천년 후에 구속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자기가 바라보는 구속자께서, 자기가 생존해 있을 때에 오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백하기를, 26절에서 보는 것처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자신이 생존해 있을 때, 구속자가 오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육체의 장막을 벗어나면, 내세에서는 성부 하나님도 만날 것이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도 뵈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도 고전 13:12절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렇습니다. 인생은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또 다른 세상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그곳을 <하늘나라>라고 하기도 하고, <천국>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곳에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며,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후,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도 계시는데, 그 곳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살던 시대에는, 구주께서는 아직 이 땅으로 성육신 하시지도 않으셨는데, <2천이 지나서야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그럼에도 욥은 그 구속자를 알고 있었고, 바라보며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27절 상반절에서는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욥이 구속자를 만나기를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말을 <연거푸 두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그의 마음이 주님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보기를>이라는 말은, 미래형이 아니라 <능동 완료형>으로 썼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뵈올 것은 미래적 사건이지만, 욥은 이미 하나님을 본 것으로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훗날 주님을 만날 때는, 낯선 사람 대하듯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보았기에, 구면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보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1절에서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듯이, 욥은 미래에 나타날 사건이지만, 그것은 이미 완료한 사건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앞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지만, 이미 본 것으로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욥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결코 흔들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을 보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27절 하반절입니다. 내 마옴이 초조하구나!” 여기 초조하다라는 말은 KJV, NIV에서는 yearn이라고 변역하여, <갈망하다>라고 하였고,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초급하다>라고 번역했는데, 이 번역이 더 좋아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이 초급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입신양명 때문입니까? 공부 때문입니까? 직장 때문입니까? 건강 때문입니까? 아니면 내 자녀들의 문제, 가정의 문제, 일가친지들의 문제 때문입니까? 그런 문제로 따진다면, 욥의 마음은 더 급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욥은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욥은, 그가 뵙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는 <내가 살아 있을 때 주님을 뵈어도 좋고, 내가 죽어서 육체 밖에서 주님을 보어도 좋다. 내가 주님을 뵈옵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에, 이제 주님을 뵙기를 원하는 마음이 초급하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초급하다>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나의 신장이 내 안에서 타서 없어져 버린다.>라는 것입니다. 욥이 얼마나 하나님 뵈옵기를 기대하고 있으면, 이런 고백을 하겠습니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은 절대로 놓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자세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욥을 어떻게 대해주셨습니까? 우리는 욥의 결말을 잘 압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자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욥기 42:10절 하반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라고 합니다. happy ending입니다. 살아계신 구속자를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굳게 선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여쭈어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시고 계십니까? 형편과 처지와 환경에 흔들리는 신앙생활을 하시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러시다면 욥이 고백한 <나의 대속자>를 바라보시면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분께서 <붙들어주시면 붙들어 주시는 대로>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언젠가는 육체 밖에서 살아계시는 나의 대속자를 볼 것이라는 소망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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