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32장 6-15 내일을 준비하는 삶 28, 384(434), 491(543)
새해 첫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 나눕시다. 예, 우리가 인사 나눈 것처럼 새해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금년은 열림교회 설립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따라서 새해에는 열림교회의 표어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라고 정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내는 데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 32장을 함께 펼쳤는데, 이 말씀의 시대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B.C. 587년경, 그러니까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즉위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바벨론이 침공을 해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쌓습니다. 이 침공은 바벨론의 세 번째 침공이었고, 이 세 번째 침공으로 유다는 망하고 맙니다.
본문은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살았던, <예레미야와 하나멜>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이들 두 사람이 걷는 길은 완전히 달랐음을 보여주면서,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달랐을까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산 사람’이었다면, 하나멜은 ‘자기 생각, 즉 자기 뜻대로 산 사람’이었으며, 예레미야는 ‘내일을 위하여 산 사람’이었다면, ‘하나멜은 현재에 매여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산 예레미야의 처지는 어땠을까요? 렘 32: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예, 하나님의 뜻대로 산 예레미야는 옥에 갇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평안과 안전을 말하지 않고,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할 것이라고 예고 하다가 그런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왕의 귀에 거슬린다고, 왕은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핍박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억울한 일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사방이 막힌 옥에 가두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예레미야와 함께 하시면서 교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사방이 막힌 옥에 가두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예레미야와 함께 하시면서 교통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을 확인해 봅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니다.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그렇지요? 사방이 막힌 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임하셔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사방이 막혀도 하늘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교통하여 주시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사방이 막힌 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함께 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주셨을까요? 7절을 봅니다.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무슨 말씀이지요? 미래의 일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한 치의 앞길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우리의 장래를 아시며, 우리의 생사회복을 주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곧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대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레미야가 이런 은혜를 입는 것을 보면서, 어디 가야 좋을지,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이는 저와 여러분들꼐도 이런 은혜가 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길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미하면서, 이런 은혜를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면서 대비하라고 하십니까?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찾아와서 밭을 사라고 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숙부는 작은 아버지니까. 숙부의 아들은 사촌을 말합니다. 사촌 하나멜이 찾아와서 밭을 사라고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을 때면,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잘 될 거야, 힘내!>라고 말해주는 것은 참 좋은 격려입니다. 그러므로 옥에 갇혔 있는 예레미야에게, 사촌이 찾아온다면, 위로해 주면서 격려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멜이 찾아온 목적은, 사촌이 옥살이로 고생한다고,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면회를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멜은 자기가 소유한 밭을 예레미야에게 팔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8절 상반절에서 보면,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입니까? 예레미야는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가족도 없는 혼자의 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선지자이기에, 토지를 사서 농작을 할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유다는 곧 망합니다.
그런 판국인데, 하나멜은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자기 밭을 사라고 합니다. 하나멜은 참으로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멜이 밭을 파는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이 밝히지 않으나,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합니다. ①먼저는, 지금 유다는 곧 망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기에, 이런 난세에는 모두가 부동산보다는 동산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하나멜도 자기 밭을 처분하여 현금을 가지고 있기를 원한 것 같습니다.
②그리고 또 한 가지의 추측은, 지금 예레미야는 국가의 흉조를 예언한 죄목 때문에 왕명에 의해 옥에 갇혔기에, 곧 처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멜은, 예레미야의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자기 호주머니로 들어오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법적인 방법인 고엘제도를 이용하여, 자기 밭을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엘제도란, 누가 어려움을 당하여 부득이하게 토지를 팔 경우, 그것을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팔아서, 그 토지가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규정한 이스라엘의 토지법입니다.
따라서 하나멜은, 자기 밭을 살 사람을 예레미야로 선정하고는, 고엘제도를 핑계로, 자기 밭을 사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8절 중반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실까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예, 하나멜은 상속권을 무를 권리를 언급하면서 자기 밭을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피상적으로 보면 지금 하나멜이 하는 말이 합리적이고, 예레미야를 위하여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엄청나게 불의한 계획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하나멜이 자기 밭을 예레미야에게 팔지만, 예레미야는 곧 처형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레미야에게는 상속자가 없으니, 그 밭은 자연히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를 위하여 사라>란 말은, 아주 교묘한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멜의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9절 말씀을 보면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은 17세겔을 달아주고는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당시 은 1세겔은 노동자의 4일 품값이었기에, 17세겔이면 약 70일 품값이 되고, 이것은 현재 시세로 한다면 일당 10만원으로 할 때, 약 700만원이 됩니다. 얼마 안 돼 보이지만, 전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판국의 부동산 가치로 따진다면 10배, 혹은 100배 이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레미야는 은 17세겔을 달아주고 사촌 하나멜의 밭을 사서, 10-11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증인 입회 하에 매매 증서를 두 통 썼는데, 한 통은 봉인하고 한 통은 봉인하지 않았습니다. 봉인한 한 통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고, 봉인치 않은 한 통은 모든 사람들이 공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예레미야는 12절에서 보는 것처럼 이 증서들을 대중에게 공개한 후, 당시 공적 서기였던 바룩에게 맡겨, 14절에서 보는 것처럼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관토록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레미야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제정신에서 하는 일인가요? 나라가 망하여 내일을 알 수 없는 처지에서, 부동산 투기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인데 말입니다. 아무리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된 사람이라도, 나라가 망할 때는 현금을 취하지, 밭을 살 사람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는 일을 거꾸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분별하는 영을 가진 선지자가 말입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6절 말씀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8절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같이...”,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줄 알았으므로...” 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에 따랐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난을 살 수 있습니다. ①하나는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비웃음을 사고 비난받을 만하고, ②다른 하나는 “저 선지자가 나라 망한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놓고, 자기는 부동산 투기를 하네”라고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했습니다.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도 새해에는 이런 삶을 살아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는 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도의 영성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단련을 통하여 획득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딤전 4“7절에서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에게는 분별하는 영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자 그런데,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예레메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로부터 어리석은 일이라고, 유언비어 퍼뜨렸다고 비난받을 만한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15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비록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포로될 것이나, 언젠가는 다시 유다로 돌아올 것이고, 그래서 다시 농토를 일구며 포도원을 가꾸며 집을 짓고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소망을 가지고 <내일>, 즉 <회복될 미래>를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 왕국의 회복을 믿으며>, 하나멜의 밭을 산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폐허의 잿더미 저 건너편에 있는 <내일의 희망>을 보았기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결단을 집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철저한 미래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공상적 미래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미래를 거머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멜은, 현재가 어렵다고 현재의 것을 버리려고 한 사람이었지만, 예레미야는, 현재는 어려울지라도 이 어려움의 때가 지나면, 밝은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미래를 준비하는, 그야말로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헨리 워드 비쳐 (Henry Ward Beecher)라는 설교가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함께 읽어주실까요? “내일은 두 개의 핸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불안의 손잡이를 잡을 수도 있고, 신앙의 손잡이를 잡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일을 향해 어떤 손잡이를 잡고 나아가십니까? 앞서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내일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 믿음의 영웅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주위에는 예수님을 믿다가 현재의 과정 때문에 쉽게 낙심하거나 절망해 버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멜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신앙의 선배들과 같이, <신앙의 손잡이>를 잡고 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 3:12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현재에 매여 살지 말고, 남은 미래를 향해 질주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멜은 현재가 어둡다고 미래를 포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내일을 준비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후손들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삶은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납득이 안 가리만큼 엉뚱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다고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자기 이익만 챙긴다고 오해받을 소지도 다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내일을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까닭에 그의 믿음이 빛나며, 후에 그의 지파 후손들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결단은, 그와 후손들을 동시에 유익하게 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말씀을 주목하며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재를 낙심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내 좁은 소견으로 현재에 매여, 내일을 잃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좀 이해가 안 된다고, 좀 마음에 맞지 않고, 좀 기대에 차지 않는다고 한눈을 판 적은 없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사방이 막혀도 하늘을 여시고 임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비록 현재가 어려울지라도 내일을 위하여 투자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어두운 밤이 될수록 동터 올 내일은 가깝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해를 맞아 첫 주일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환경 속에 있든지, 그 상황에 매여 하나멜 같이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내일을 잃을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환경이 역겨울지라도, 그 역경이 내일의 복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예레미야 같이 믿음으로 순종하며 행하심으로, 내일을 아름답게 준비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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