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5장 1-6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28 595(372) 623
오늘 우리는 왕하 5:1-6절 말씀을 함께 펼쳤습니다. 사실은 19절까지를 보아야 하지만 시간 관계상, 6절까지만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이지만, 다시 한번 그 내용을 들여다보도록 합니다.
따라서 1절 말씀부터 보면, 아람이라는 나라, 지금은 시리아이지요, 이 나라에 유명한 구국 충신인 <나아만> 장군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가 나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당시의 나병은 천병이었고, 걸리면 죽는 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아만도 그 모든 명성을 뒤로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판이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으며,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보는 것처럼, 나아만의 집에는 수종드는 어린 소녀 하나가 있었는데, 그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사로잡혀 온 자였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말합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시는 선지자에게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요.
그러자 아내로부터 어린 소녀의 말을 전해 들은 나아만은, 4절에서 보는 것처럼 왕에게 나아가서 어린 소녀의 말을 전하면서, 사마리아로 가서 엘리사를 만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5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람 왕은 나아만을 위해 친서를 써주면서,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이스라엘 왕에게 가서 부탁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이스라엘 왕에게 가서 친서를 전했더니, 7절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의 서한을 읽고는 옷을 찢으며 이르기를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런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8절에서 보는 것처럼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나아만의 병을 고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에게 일러 엘리사에게로 가라고 하였고, 이에 9절에서 보는 것처럼, 나아만은 이스라엘 왕의 말을 듣고는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10절에서 보는 것처럼 엘리사가 사자를 보내어 나아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고요.
그러자 나아만은 11절에서 보는 것처럼 노하여 물러가며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12절에서는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고 하면서,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13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14절에서 보는 것처럼 나아만은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하여 나병에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그가 평안히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나아만이 나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나아만이 나병에서 고침을 받음으로, 그의 영혼도 구원을 받는 자리로 나아갔으며,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딤전 2:4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사시면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우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시면서, 결국은 그들이 믿어, 구원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만 백성에게 영육 간에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도 영육간에 복을 누려야 합니다. 나아만에게 육신의 병도 고침받게 하시고, 영혼의 구원도 받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복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육간에 복을 받는 역사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본문 말씀을 잘 살피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이유랄까, 아니면 비결이라고 하는 것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선,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를 주목하자고 말씀드립니다. 그 소녀가 있었기에, 나아만이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이 어린 소녀가 나아만의 집에 없었다면,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지도 못했을 것이고, 고침을 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집에는 나아만에게 기쁜 소식,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해준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그 소녀의 말을 듣고는 사마리아에서 살고 있던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가서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에게로 가서 나병을 고침 받도록 하였던 이 어린 소녀는 누구입니까? 이 어린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사로잡혀 온 소녀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상처가 있는 소녀였습니다. 불행한 소녀였습니다. 어린 소녀였다고 하니, 부모님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고, 친구들이 그리운 아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린 소녀는 눈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소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어린 소녀는, 삶에 의욕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사로잡아 온 사람을 죽도록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같이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를 일으켜, 학대를 당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성립된다면, 나아만을 비롯한 그 집안 식구들은 이 소녀를 늘 경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신뢰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이 어린 소녀와 나아만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어린 소녀의 말을 나아만의 아내도, 그리고 나아만도 곧이곧대로 들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는 나아만 아닙니까? 그럼에도 종살이를 하는 그 어린 소녀가,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에게 가면 나병을 고침받을 수 있다고 하자,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왕에게 찾아가서는 그렇게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나아만도, 그의 아내도, 이 소녀를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비록 이 소녀가 사로잡혀 왔으나, 나아만의 집에서 종으로 살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살았음을 알게 합니다. 비록 자기는 사로잡혀 와서 종으로 살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의 현장에서 성실히 살면서, 주인을 공경하며 살았고, 그래서 주인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나병에 걸리자,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가서 고침을 받도록 청을 드렸고, 그러자 나아만의 아내와 나아만은, 이 어린 소녀의 말을 듣고는 조금도 지체없이, 왕에게 찾아가서, <엘리사에게로 가서 고침을 받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린 소녀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형편과 처지로 있든지, 우리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성실히 살려고 하여야 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려고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저 어린 소녀보다도 못난 자들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 어린 소녀는, 자신을 사로잡아 간 원수의 집에서도 성실히 살면서, 그 주인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뢰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인의 육신의 구원을 물론, 영혼도 구원했습니다. 도전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도 보아야 합니다. 나아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충언을 한 종들입니다. 그들 역시 종이었으나, 주인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 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고 할 때, 충언으로 주인의 마음을 되돌렸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의 마음을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아니 자녀의 마음도 되돌리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기도 어렵고,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기도 어렵습니다. 세상살이가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이 주인의 마음을 되돌린다는 것은, 어쩌면 상상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종들이 나아만 장군의 마음을 되돌렸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말을 듣고 돌아섰던 나아만이 되돌아서서,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여,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나아가 그의 영혼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나아만이 처음에 엘리사의 말을 듣고 돌아서면서 하는 말을 다시 한번 볼까요? 12절입니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이런 사람이 쉽게 마음을 돌리겠습니까? 그것도 동료가 말하는 것도 아니고, 종들이 마음을 돌리라고 말할 때 말입니다. 어렵지요. 자존심의 문제도 있습니다. 체면도 있습니다. 도무지 이성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은 종들에게 더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들은 그런 분위기를 알면서도, 나아만 장군에게 충언을 하였습니다. 생명을 걸고 충언을 하였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충언을 하였을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장군이 반드시 고침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충언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랬기 까닭에, 나아만은 종들의 충언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도전이 됩니다. 무슨 일을 두고,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심입니다. 나의 진심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최선입니다. 결과를 보기까지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거기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저는 종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한번 충언을 드려, 나아만 장군의 마음을 바꾸도록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 번, 스무 번, 아니 백 번을 간청하고, 또 간청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랬을 때, 나아만은 종들의 진심을 보았을 것이고, 최선과 인내를 보았을 것이고, 그래서 마음을 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마음을 바꾸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어, 나병을 깨끗하게 고침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이 구원을 얻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고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갔을 것이고, 그 후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접하게 하실까요? 저는 그 이유를,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를 위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져야 하고,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하여 배움을 얻으라고 이 말씀을 펼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뜻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나아만 같이 문제 만난 사람도 있어야 하고,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고, 나아만의 아내 같은 사람, 나아만의 종들 같은 사람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그 어느 대상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림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위치에서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내가 어린 소녀의 위치에 서든지, 나아만의 위치에 서든지, 그의 아내의 위치에 서든지, 아니면 엘리사의 위치에 서든지, 아니면 나아만의 종의 위치에 서든지 간에, 나의 본분에 성실하고 진실하고, 인내하면서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쓰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분들께 주님의 은혜와 평강과 능력과 기쁨과 감사와 감격과 소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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