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2장 1-8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1 216(356) 321(351)
오늘 우리는 성가대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그런데 성가대만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케임브리지 열림교회를 이루는 모든 교우들, 즉 주일학교를 비롯하여 중고등부, 청년부, 남녀전도회, 찬양단, 성가대 모두가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우리가 함께 펼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성경이 권면하는 대로 아름다운 헌신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1절 말씀을 함께 보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 “그러므로”라는 말은, 로마서 1장 1절부터 11장 36절까지의 말씀과 12장 이하의 말씀을 연결해 주는 접속사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12장 앞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였을까요? 간략히 말씀드리면, 인간은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총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은, 이제부터 “이렇게 살아라”라고 권면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권면은 자기 마음대로의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권면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에 입각한 권면>을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긍휼히 여겨 주시는지,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를 입혀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동정해 주시는지를 알아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 기댈 수 있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신으로 권한다>고,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간절히 호소하면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 한번 여쭈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받아야 합니까? 받지 말아야 합니까? 억만 가지 죄악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예배의 삶을 살아내라는 바울의 권면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하는데, 여기서 ‘산 제사’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살아있는 헌신’, ‘살아있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영적 예배가 되는, 살아 있는 헌신>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몸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몸>이란 단순한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육을 포함한 전인>을 의미하기에, 헌신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의지와 행위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보니, 손과 발은 안보이고 입만 가진 이상한 사람들이 천국에 가득하더랍니다. 너무나 이상하여 물었다고 합니다. “주님, 이 천국은 왜 입만 가진 사람들로 가득합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손발은 놀고, 입으로만 모든 일을 하였기 때문이란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얼마 후에 어떤 게으른 교인 하나가 또 천국에 가보았습니다. 천국에 도달하니 으리으리한 집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 앞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문패를 달고 계셨습니다. 이를 본 게름뱅이가 예수님 곁에 서 있는 천사에게 “저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자기 교회 집사님 이름을 부르더랍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괜스레 신이 났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해서 헌금도 자기보다 조금한 집사의 집이 저 정도면, 보나마나 자기의 집은 최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대를 가지고 자기 집에 가보니, 아직 기초도 안 다져져 있더랍니다.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천사 왈 “천국의 집은 세상에서 성도들이 일하는 대로, 천사들이 따라 일해서 짓는다”고 하더랍니다.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이겠지만, 도전되는 교훈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일한 만큼, 하늘 기업을 누릴 수 있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헌신의 삶은, 단지 교회 안에서의 섬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 이유는, 마 25:40절에서 보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목사가 되고, 집사가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헌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직 덜 성숙된 자아가 요동을 치기 때문이고, 세상 또한 성도들이 몸으로 살아있는 헌신을 하도록 가만두지 않고, 막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시대적 감각이 뒤떨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온갖 불의와 방탕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기에, 이러한 시대적 조류나 유행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장 프랑소와 밀레(Jean Francois Millet)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그린 ‘만종’, ‘이삭 줍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 ‘양치는 사람’ 등의 풍경화는, 명화중의 명화입니다. 그런데 밀레가 이런 풍경화를 그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초기의 무명 시절엔 무척 가난하였기 때문에, 당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누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건장한 두 사람이 맥주잔을 들이키며, 자기의 그림을 보면서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모습을 밀레는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하는 짓이 너무나 추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밀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사는 것도 좋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나는 이제부터 더욱 인간미가 깃든 그림을 그릴테다!” 그래서 밀레는 그림의 소재를 농가 쪽으로 옮겨서 주로 농부의 삶을 그의 화폭에 담음으로, 수많은 명작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바꾸고 변화된 사람은 위대한 일을 합니다. 노예선의 선장으로 일하던 존 뉴턴도 변화를 받아 목회자가 되어, 일생 동안 주님을 섬겼고, 불량아였던 조지 뮬러도 변화를 받아,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하는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사울로 살면서, “훼방자요, 포악자요, 핍박자”였으나, 변화를 받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에서 돌아서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전과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이 예배를 통하여 변화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바울의 다음 권면을 봅니다. 3절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바울은, 믿음은 하나님이 나눠 주신 은혜의 선물인데, 그 선물에는 분량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며 헌신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은 <허영>이기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소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스스로 짊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면은, ‘주님을 섬기는데 소극적이거나, 게으르고 나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생각할 바를 생각한다'라는 말은, “자신의 처지나 조건에 맞는 생각을 한다”는 말로서, 너무 과하게 생각하여도 안 되지만, 너무 소극적이어도 안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념하실 것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현재 가진 믿음보다 나중의 믿음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들은 현재의 믿음보다 나중의 믿음이 더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진보를 보이며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진보는 어떻게 얻습니까? 말씀과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믿음의 분량이 더해지고 싶으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귀담아듣고, 혼자서 아니면 그룹으로, 아니면 가족들끼리, 말씀을 묵상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루 한 장씩 말씀 묵상하는 <오늘의 양식> Q.T를 꼭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새벽기도회에 함께 하여 말씀을 들은 후, <오늘의 양식>을 묵상하신다면 더 좋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중에 있는 성경공부에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믿음의 진보를 보시고, 그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자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진 한 장을 봅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구두 수선을 하던 방입니다. 긴 탁자에서 구두수선을 하였습니다. 케리는 이렇게 좁은 방에서 구두 수선을 하면서 독학으로 여러 나라의 언어를 꾸준히 공부하여, 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척 동생과 함께 옥스퍼드의 한 대학에서 유명한 어학교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대화 중에 그 교수님은 케리에게 “당신이 이 학교에 들어오면 이 나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이 나라의 여왕께서도 당신을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케리는 그분의 말을 이렇게 거절하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을 말씀하셨는데, 제게는 이미 저의 전 생애를 건 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여왕보다 더 높으신 분의 부름을 받았고, 그분을 향한 저의 충성은 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 이 세상은 다양성이 있으므로, 우리는 각기 여러 분야에서 종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왜 인가?”라는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가정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국가와 세계를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케리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지 않고, 인도의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여왕을 위하여 살도록 하시기보다는, 인도 선교를 위하여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면서,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또 다른 권면이 나오는 4-5절을 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는 모두가 <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각각 다른 직분과 직책을 가졌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그 다른 직분과 직책이 무엇인가를 6-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각각 받은 은사를 따라서 감당해야 할 <7가지의 예>로 설명하는데, ①예언 ②섬기는 일, ③가르치는 일, ④위로, ⑤구제, ⑥다스림, ⑦긍휼을 베푸는 일 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각자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탁월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 너 잘났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서로를 세워주고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해서는 일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일치는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그런 일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는 요점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은 자들로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으로 거룩한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변화를 받아 더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면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로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한 비전, 한 가슴, 한 열정을 가질 때, 이 일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은대로 살면서, 주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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