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0장 19-23 성령을 받으라 1 187(171) 191(427)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신 후,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바로 승천하시지 않으시고, 이 땅에 40일간 계시다가 승천해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해 가시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행 1:4-5절을 보십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성령강림이 있었습니까? 행 2:1-3절 말씀을 같이 보십시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예,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순절 날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점으로 하여, 50일이 된 날을 의미하며, 예수님께서 승천해 가신 날로 따진다면, 10일 후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달력으로 하면, 오늘이 바로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승천해 가시면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을까요? 요 14:16절 말씀을 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보혜사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보혜사이신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보혜사>라는 말씀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는 잘 부르지만, <보혜사>라고는 잘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하심으로, 실상은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혜사라는 의미가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도 보혜사라고 하시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까?
<보혜사>란 말은, 보시는 것처럼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인데, 그 뜻은 <위로자>, <상담자>, <변호자>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KJV에서는
따라서, 보혜사로서 일하시던 주님께서는 떠나가셔도,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성도로 하여금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위로해 주시며, 어떤 어려운 일을 놓고 고민할 때는 상담자가 되어주시며, 어려운 문제를 만날 경우에는, 변호하거나 중재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자 되시고, 상담자 되시고, 변호자 되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너무나 많은 어려운 일, 복잡한 일, 억울한 일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져 힘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죄 문제로 갈등해야 하고, 때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음해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때로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고민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기에, 이런 어려움은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곤고하게 만듭니다.
그럴라치면, 사람들은 <죽고 싶다>라고 합니다. <포기하고 싶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막가는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위로해 주시고, 상담자가 되어주시고, 변호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 보혜사는 진리의 교사이기도 합니다. 요 14:26절을 보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 보시는 것처럼,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여,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리스도와 진리에 대하여 혼동하지 않게 됩니다. 믿음에 확실히 서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문명과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덜 복잡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갈등하고 있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과학과 의학이 눈부실 정도로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욱 극복할 수 없는 어떤 한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명국이 될수록 행복지수는 오히려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지수는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보다는, 가난하고 낙후된 환경 가운데 사는 사람이 높습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세상 문화와 물질문명이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신비한 세계를 동경하며, 기나 심령과학, UFO나, 그 밖의 무속이나 귀신 등에 더욱 심취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혼동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승천해 가시던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3. 보혜사란 말은 helper, 즉 신자를 보호하여 돕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는 “~의 옆으로 불림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 단어는 “~~를 도와 구원해 주기 위해 옆에 서 있는 자”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helper 또는 support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KJV에서는 comforter라고 번역하였지만, NKJ에서는 helper라고 번역하였습니다. comforter도 좋지만, helper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도움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에 주목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보혜사로 계시면서 성도를 도우시다가, 이제는 떠나가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계속적으로 도우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 그리고 승천하심> 전에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께서 승천해 가시면서 보내시겠다고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자, 그 때부터 제자들은 혼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보혜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9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에는, 그들이 모여도 몰래 모였고, 모였을 때에는 혹시 유대인들에게 들켜 고난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문을 닫고 모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이렇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막 16:15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실까요?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모여서 문을 닫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거리를 활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고, 온 천하로 나아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을 닫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혼자 나가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모습이 제자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이유는 <보혜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무능을 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19절 하반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1절 상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다시 한번 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몸으로 변화를 입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문을 꽁꽁 닫았는데도 그곳에 나타나셔서, 두 번씩이나 연거푸 평강을 기원하셨는데, 그 이유는, 장차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감당해야 할 자들인데, 지금처럼 문을 닫아 놓고 두려워 떨며 살아가는 형편없는 겁쟁이들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선포하신 후, 21절 하반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보내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텔로>인데, 이 단어는 <파송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어떤 권위 있는 자가, 자기의 대리인에게 자신의 권위를 갖도록 하여, 어떤 사명을 수행하도록 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국가 원수가 대사를 파송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실 때는 그냥 보내실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떨고 있는 자들을 그냥 보내기만 한다고 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을 재충전시키셔서, 권능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22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모습을 상상케 합니다. 따라서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은, “받으라”라는 말의 의미를 살피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받으라>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람바노>인데, 이 말은, 넘겨주면서 데려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 18:31절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면서, 데려가서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요 19:6절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면서 <데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제자들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넘겨주시는 성령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군가가 <성령을 받으라>라고 한다면, 그 말은 이단적인 선언입니다. 이 말은, 오직 성령을 넘겨주실 수 있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넘겨주셔서, 무엇을 하도록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행 1:8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보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 이것이 성령충만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령 받으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병도 고치고...> 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방언, 예언, 병고침의 은사는 좋은 것이지만, 그런 은사를 받고, 그냥 혼자서만 기분 좋다고 하고, 자기 잘났다고 하면서 살아가려고 하고, 복음 전파를 하지 않거나, 복음 전파에 방해되는 일을 한다면, 성령 받음은 헛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은 복음전파를 위한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복음을 위하여,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시면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흔들리십니까? 세상은 커 보이고, 나는 초라해 보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늘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눌려 있습니까? 죄를 이기며 살고 싶은데, 돌아보면 또 죄의 흔적이 보입니까?
이런 것들을 이기고, 극복하시려면, 성령으로 충만하셔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담대하게 삽니다. 능력있게 삽니다. 왜요? 성령은 power,요, 성령은 fire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두려워하여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거침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보혜사 성령충만할 때,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고, 믿게 하시고, 위로해주시고, 도와주시고 옹호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피곤합니까? 고달픕니까? 억울합니까? 눈물나는 일이 있습니까? 성령충만하시면 찬송하면서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성령충만할 수 있는 지는 다음 주일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성령강림 주일에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은, 성령충만하셔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내시면서, 기뻐하고 찬송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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