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일만 되면 교회에 나옵니다. 날씨가 굳은데도, 오늘도 우리는 교회로 나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 보려고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나온 것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매주 교회에 나오는 저와 여러분들은, 과연 예배를 잘 드리고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고 있을까요?
창세기 3장을 펼치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예배라는 단어보다는, 제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제사와 예배를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롬 12:1절에서 보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제사를 다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제사는 받으시지만, 어떤 제사는 거부하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함께 예배를 드려도, 누구의 예배는 열납되고, 누구의 예배는 거절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림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이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자의 자세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예배자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어떤 관심 하에서, 어떻게 예배 하느냐에 따라서, 그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느냐, 아니냐가 좌우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예배 자세를 바르게 확립해 보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는 말씀이 3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 이 질문이 있게 된 배경을 간략히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와서, 예수님의 활동무대를 열기 위하여,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 복음을 받는 자들에게는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며, 세례를 받고, 요한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선언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며, 눈먼 자를 보게 하며, 귀신들린 자를 고치며, 죽은 자도 살리며 복음을 전하자, 요한과 요한의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여든 무리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너희들이 세례 요한의 소문을 듣고 광야로 나갔을 때, 무슨 목적을 가지고, 어떤 자세로 나갔더냐?”고 물으시면서, <그 목적의식이 잘못되었고, 그 자세가 잘못되었다면>, 요한을 잘 못 보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또한 그가 전파하는 메시지도 바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광야로 나갔던 일은 헛일이었으며, 따라서 지금 너희들이 나에게 나와 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목적으로, 어떤 자세로 나왔느냐?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질문이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라고 하시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왜 교회에 나왔는가?>를 살피며, 은혜의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물으시면서, 3가지 유형을 제시합니다. 그 3가지 유형 중, 2가지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이렇게 잘못된 유형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유형의 삶을 사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잘못된 유형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1. 첫 번째 유형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만 보는 유형입니다.
24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이 말씀은 <너희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어야 했고, 그래서 하늘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했을 터인데, 그것 보다는 사람들이 나가니까 이유 없이, 호기심으로 광야로 나갔다가, 요한의 메시지는 듣지 못하고 광야에서 나부끼는 갈대만 보고 오지 않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쉽게 적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세례 요한이 살던 광야에는 갈대가 흔했기 때문에, 광야에 나가면 무의식적으로도 갈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메시지를 전하는 광야에 나갔다면,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와야 하는데, 갈대만 보고 온 사람들은 얼마나 한심한 발걸음을 한 것입니까? 복음을 듣느냐, 못 듣느냐 하는 것은, 생명의 존폐를 가늠하는 것인데, 복음을 들어야 하는 그 현장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만 보내며, 주변에 늘려있는 갈대만 구경하다가 발걸음을 돌린 사람들,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하시면서,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 앞에 있지만, 역시 복음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이렇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 교회에 왜 나왔느냐?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교회에 나와서, 시간만 때우다가 가는, 소위 <교회만 ‘왔다 갔다’ 하지 않느냐?>라고,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 아주 위험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교회는 갔다 왔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입니까?
교회에 나왔으면,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갔다 왔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도 잘 들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었고, 그래서 기쁨이 있었고, 감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주간 동안 말씀 붙잡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없이, 그냥 “교회에 갔다 왔다”라고만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보다야, 그렇게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왕에 교회에 나오셨다면, 그야말로 바르게, 또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찬송도 힘차게 부르고, 기도도 간절히 하고, 말씀도 정신 차리고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집중하여 듣는 자는, 몇 마디에도 은혜가 넘치는 줄 믿습니다.
존 웨슬레 목사님은 페인트공인, ‘홀런드’씨가 읽어주는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스폴젼 목사님은 구두 수선공의 설교 한 마디, “주님만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젊은이, 그대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시는가?”라는 이 단순한 메시지에 불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사모하는 심령으로 말씀을 청종할 때 임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확립될 때, 하나님의 뜨거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고, 믿음이 더하고,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여러분들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관심사이십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몸을 내어주셔서, 구주가 되신 그분께, 감격의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격의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을 듣고 믿음을 더하기 원하십니까? 그래서 주님 말씀 순종하여, 살아내시기를 원하십니까? 이제까지 그렇지 않으셨다면, 이제 여러분들의 관심, 시선, 마음 자세를,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유형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만 보는 유형입니다.
25절에서는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더러운 옷 입은 사람들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광야에 나갈 때, 무언가 목적은 가지고 있었고, 무언가 관심은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 목적과 관심이 세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엉뚱한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로 나간 그들이, 요한의 메시지를 듣는 것보다는, 요한의 외모 구경만 했고, 그리고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과 그들이 입은 옷만 구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성경은 NO라고 하면서, 화려하게 옷 입고 사치하는 자들을 보려면 왕궁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예배입니다. 그리고 예배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중심이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 중에 말씀 선포 시간이 가장 깁니다.
그런데, 다른 순서들은 잘해 나가다가, 말씀 듣는 시간만 되면 ‘아~’ 하고 하품을 하기 시작하면 참 곤란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관심이 없고, 흥미가 없다 보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오늘은 누가 왔나, 왜 아무개는 안 보이지? 저 사람은 왜 저런 옷을 입고 왔지...’ 라고 한다면, 그 예배는 의미 없는 예배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교우들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옆 사람과 소곤소곤 말하는 것, 늦게 오시는 분들께 인사하는 것, 이런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인사하고 교제하는 것은, 예배 후에, 성도가 서로 교제하며 교통하는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는, 오로지 예배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위 구경, 사람 구경, 입고 온 옷 구경... 등등에 관심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딴전 피우는 것을 경계시키시면서,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라고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전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왔다가 예배는 드리지 못하고, 메시지도 듣지 못하고, 예배 구경만 하다가 돌아가는 발걸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들은 말씀은, 한 주간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에 들은 설교 제목과 줄거리는, 한 주간 동안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 세 번째 유형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는 유형입니다.
26절을 보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Yes)라고 하시면서,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자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28절 상반절에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을 만나, 말씀을 들으려고 광야로 나간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 입니까? 그들이 요한의 말씀을 귀담아 들음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믿음도 생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요한의 말을 듣고, 믿음이 생긴 그들은, 이제 그들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모인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져야 하고,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뵈옵고, 그분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려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는 선지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으나, 28절 하반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비록 이 땅에서는 비천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누구보다도 큰 자들로 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옳은 데 관심을 가져야 할 세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고 합니까? 30절에서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고 합니다. 32절에서는, 이 세대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 ‘무감각한 세대’라고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이 최고의 관심사이고, 가치 있는 일이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들은, 옳은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며, 교회에 나오실 때도, 흔들리는 갈대만 보는 유형, 즉 <교회 갔다 왔다>라고만 하는 분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보고 가는 유형의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커지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으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땅의 요한보다도 더 큰 자로 서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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