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장25-38 성탄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 115(115), 122(122), 125(125)
성경 사 7:14절을 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미가 선지자도, 미 5:2절에서 보는 것처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짓이 됩니다. 하지만 눅 2:11절을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합니다.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 4:4절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탄절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예언으로 약속하셨고, 그리고 그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리면서 성탄주일로 지킵니다.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할까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펼치면, 성탄하신 메시야를 만나, 첫 번째 성탄절을 지키며 은혜를 경험하였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목자들이 있고, 동방 박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펼친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성탄하신 지 40일쯤에 예수님을 만나 감격하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본문 앞의 22절 말씀을 보면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은, 아기를 낳은 산모는 모세의 정결법에 따라, 아들을 낳았을 경우는 40일, 딸을 낳았을 때는 80일이 지나, 정결 예식으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던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들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출산 40일이 지나서 아이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 정결 예식을 드리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을 특별히 만난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는데, 그 사람들은 시므온과 안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성탄하신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2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성탄하신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4가지 면에서 잘 보여줍니다.
첫째로는, 시므온을 소개하면서 그의 직위나 평판을 소개하지 않고, 단순히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만 밝힙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아, 시므온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어떤 내놓을만한 지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탄하신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둘째로는, 그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었는데,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기록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은 있으나 의롭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배웠고 높은 지위에 있으나, 생활을 들여다보면 경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너무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살다가 성탄하신 메시야를 만나 감격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셋째로는,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위로”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 공동체는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았을 뿐 아니라, 무려 400년간 암흑기를 지나오고 있었기에, 이런 처절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며 진정한 위로란, 메시야이신 구주께서 오셔서 저들을 위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위로에 대한 소망이 없었으나, 시므온은 달랐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신 메시야가 올 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아니, 삶이 힘들고 고달프기 때문에, 위로자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해방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기에,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버거웠기에, 성도들이 예배당에 모이기만 하면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라고 찬송하였던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근심과 걱정거리가 몰려와도, 예수 그리스도는 능히 모든 것의 위로자이시기에, 우리는 메시야를 만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메시야를 사모해야 합니다. 거기에만 진정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시므온은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시기에, 평범하게 살면서도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중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였던 시므온은, 성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면,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는데,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지시였습니다. 영적 암흑기가 400년이나 지속되어 오던 그 때에,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이런 특별한 계시를 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이며, 그러므로 시므온이 이런 은혜를 누릴 때는 너무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밥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감격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배고픈 줄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특별 계시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께도 이 성탄절에,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감격과 황홀함이 밀려오는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풀이 죽어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하면, 그 사람은 달라집니다. 사도들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3년간 배운 그들이었으나,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모두 비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후에는, 그들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생명 내걸고도 신앙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에게는 성령의 특별한 임재가 있었고, “죽기 전에 구주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래서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라고 말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27절에서 보는 것처럼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감격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때를 같이하여,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성령께서 시므온으로 하여금,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심을 알게 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었지만,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아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었기에,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가 메시야이심을 단번에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영안이 열려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므온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28절에서 보는 것처럼 시므온은 마리아의 품에서 아기를 받아 안고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찬송을 보십시오. 29절에서는 이제는 평안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을 벌어서가 아닙니다. 무슨 좋은 것을 얻어서도 아닙니다. 30절에서 보는 것처럼 눈으로 구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안고 있는 그분이 메시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는 자기에게 뿐만 아니라, 31-32절에서 보는 것처럼 주님은 만민의 구주가 되실 것이며, 그분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며,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감사 찬송을 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36-37절을 보면 안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예, 안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의 한 지파인 아셀 지파에 속한 바누엘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바누엘”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발음이며, 히브리식 발음으로 하면 “브니엘”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안나의 아버지 바누엘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경건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안나 또한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아 경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나는 선지자였다고 합니다. 여 선지자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안나는 여 선지자였다고 하니, 참으로 경건한 여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안나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된 어두운 시대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그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부모 된 자들은,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러주기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또한 안나는 인생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홀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안나는 아주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었기에, 인생의 고달픔이 참으로 많았을 것이고, 몹시도 외로웠을 것인데, 현재 나이 84세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처한 슬픔과 외로움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입니다. 안나는 고달픈 인생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멋진 여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도전받고 본받을 만한 분입니다.
안나가 인생의 고달픔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데는 두 가지 비결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의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팔십사 세가 되기까지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힘들고 괴로울 때, 낙망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보혜사이신 위로자, 구주이신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의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38절 상반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시므온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 메시야를 만난 것처럼, 안나 또한 성전에서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감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ευχαριστεω)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감사하다”란 말은, 헬라어로 “안쏘몰로게이토”(ἀνθωμολογεῖτο)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뜻은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을 시인하다”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따라서 안나는 구주를 보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나의 감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38절 하반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라고 합니다. 여기 “예루살렘의 속량”이란, 온 이스라엘이 구속의 은총을 입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혈통적인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속량하시는 구주이십니다. 그분께서 약속대로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도, 안나도 그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 번째로 맞은 성탄의 계절을 은혜롭게 보냈습니다.
이제 시간이 흘러,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신지 2029년이 흐른 시점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여전히 메시야이시며, 구주시며, 진정한 위로자이십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전의 시므온처럼, 안나처럼 메시야를 만나야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언제나 고달프고, 외롭고, 그래서 위로가 필요하고, 회복이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서는,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를 기다려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힘입어야 하며, 안나처럼 신앙의 선배들의 경건을 본받아 살면서 세상의 위로가 아닌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성전 찾기에 열심을 내며, 기도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느 순간에 우리도 메시야를 만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므온처럼, 안나처럼 무한 감사 찬양하며, 이웃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돌아가고, 땅에서는 더욱 주님의 은총이 더해지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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