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2장1-10 생명력이 요동치는 교회 88, 486(474) 518(252)
우리는 2026년 새해를 맞으면서 <생명력이 요동치는 교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열림교회가 생명력이 요동치는 교회로 서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펼친 본문을 함께 상고하면서 그 비결을 배워보도록 합니다.
본문은, 1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생명력이 요동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생명력으로 요동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었던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셨다고 하니, 이제 우리는 생명력이 요동치는 교회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죽은 자들이었을까요? 롬 6: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저와 여러분들은 아담 안에서 원죄로 인하여 이미 죽었을 뿐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 계속해서 자범죄인 허물과 죄를 지으면서, 영적 죽음에 깊이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죽게 했던 원죄라는 것은 알겠는데, 자범죄인 “허물”은 무엇이고, 또 “죄”는 무엇입니까?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허물”이란 “하나님의 법을 침범한 것”을 의미하며, “죄”란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허물이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이요, 죄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란 한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케임브리지의 college로 들어가 보면, 보시는 것처럼 너무 잘 다듬어진 잔디밭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밟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저렇게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 그러므로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냥 들어갑니다. 그것이 허물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한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그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화살을 쏘는 사람에게 맞출 목표를 정해주면서, “명중시키십시오.”라고 했는데, 그가 쏜 화살이 그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게 했을 때, 그것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알고, 여러분들도 아시는 대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런 허물을 범하고, 또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시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저와 여러분들을 허물과 죄로 몰아넣고 있을까요? 2절 말씀을 보면, 우리를 허물과 죄로 몰아넣는 지배적인 요소 2가지를 소개하는데, 하나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풍조를 따르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만들었고, 사탄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활동하면서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함으로써, 허물과 죄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3절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모두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도”라고 하지 않고, “우리도”라는 표현으로, 자신도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 풍속과 공중 권세잡은 자를 따르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고, 그래서 자기 멋대로 무력을 행사하며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폭군이요, 행악자로 살면서, 허물과 죄를 범함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복음을 듣지 못했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했을 때는, 세상의 지배, 마귀의 지배, 육체의 지배를 받으면서, 허물과 죄를 범하며 살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그런 삶을 살던 바울도, 우리도,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절대로 생명력이 요동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생명력이 요동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죽은 상태로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살리셨을까요? 4절에서는 설명하기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 동기 2가지가 소개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긍휼이라는 말은 설명이 필요한 단어이기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심할 때의 일인데, 어느 백인이 정원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답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인디언이 너무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그의 곁으로 가서 “제게 물 한 그릇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더니, ‘NO’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좀 주세요”라고 하니까, “인디언 놈한테 못 줘!”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인디언은 맥없이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백인이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사냥개를 잃어버리고, 길도 잃어, 조난당한 채 헤매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쓰러졌습니다. 그를 이 아메리칸 인디언이 발견하고, 자기 집에 데려다 간호해 주고 죽을 써주어서 정신을 차리게 됐는데, 보니까 자기가 물을 거절했던 그 인디언 추장이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니까, 그때 그 인디언이 빙그레 웃으면서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했더라면 당신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긍휼이란 당연히 보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역동적인 사랑의 행동입니다. 긍휼이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단호하고 엄격하게 대우하지 않는 부드러운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긍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풍성한 긍휼과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되, 어떤 방식으로 살리셨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5절에서 보는 것처럼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성령의 능력으로 살리실 때, 그리스도 혼자만 살아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는 진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으로, 이런 연합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나의 구주로 믿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런 진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결혼”이라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는 완전히 남남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두 사람이지만 한 몸이 됩니다. 그러므로 촌수도 무촌입니다. 부모와 자녀는 1촌이라도 부부는 무촌입니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이것이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2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6절을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합니다. 2가지 사건 중에서, 하나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부활에도 동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신비적으로 연합한 우리의 머리 되신 주께서 부활하신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도 당연히 함께 부활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땅에 있으나, 승천하여 하늘에 이미 앉았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이해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으로 인하여, 머리와 몸이 일체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승천은 곧 성도의 승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활과, 승천하여 하늘에 앉음>은, 실제적으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만 일어났고, 지체인 우리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었기에, ①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생명이요, ②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부활이며, ③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늘에 앉으심은, 곧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보증되고,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어느 누구도 훼손시킬 수 없도록 완전히 보장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보장된 내 신분이 어떠한지를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생명력이 요동치는 교회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먼저 7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오는 여러 세대”란 바울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부터, 주님의 재림까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일으키심을 받았고, 하늘에 앉히심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우리의 구원과 천국에서의 삶이 보장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요동치는 생명력으로, 이런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을, 주님께서 재림해 오실 그날까지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력이 요동치는 교회가 맺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자칫하면 교만하고 자랑하면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8절에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에는, 인간 구원의 방편 두 가지 요소가 소개되는데, 하나는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주신 것이고, “믿음”은 인간 편에서 가질 태도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통로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믿음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증거할 때, 9절에서 보는 것처럼 절대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라고 합니다. 잘난 체도 말고, 우쭐거리지도 말고, 형제나 이웃을 깔보거나 비웃거나 손가락질하지도 말고, 나의 나 된 것에 감사하면서,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요동치는 교회란,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가르치는데, 그 목적은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행할 선행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허물과 죄”와 대조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일”이 선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 10:31절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앞에 놓고,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를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를 고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움직이기 전에, 말하기 전에, 5-10초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존심을 세우고, 내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내 존재감이 과시되기를 원하는 생각으로 일하고, 말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닙니다. 선한 일은, 내가 소금같이 희생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을 밝히면서 타 없어져 버리는 초와 같이, 나를 희생하며 나를 낮추고, 하나님의 영광 뒤에 나를 숨기는 삶이,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한 일에 아주 서툽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고, 자기 영광을 위하고, 자기 배를 위해서는 열심을 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선한 일”에는 많이 서툴기도 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오늘 다시 배웠으니,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선한 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위하여 우리가 행하여야 할 선한 일을 미리 예비해 놓으셨다고 하니,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예의주시 하여야 합니다. 우리들 곁에는 하나님께서 “전에 예비해 놓으신” 내가 해야 할 선한 일이 널려 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지나치고 있지는 않는지요? 보이기는 하고, 알기는 하지만, 상황을 따지고,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워 거들떠보지 않으려고 피하고 있고, 주춤거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살아있는 나무는 생동하며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은, 생명력이 요동치는 가운데, 선한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갈수록 타락해 가는 세속문화 속에 어울려, 기개가 없이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속문화를 변혁시키는 일군으로 살아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새 삶을 살도록 새 생명을 주신 이 귀한 은혜를, 값싼 것으로 여기며, 엉터리로 살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저와 여러분들은 생명력이 요동치는 삶을 살면서, 선한 일로 “하나님께는 영광”, “이웃에게는 유익을 도모”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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