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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장12-27 승리의 날을 향하여(23.06.02-25)
김태규 2023-06-02 추천 0 댓글 0 조회 211

812-27 승리의 날을 향하여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연합군은 노르망디라고 하는 해안에 상륙했다. 그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그 날은 승리를 예감하는 결정적인 날이었다. 그래서 그 날을 D-day라고 부른다. D-day!, 결전의 날!, 그러나 그 날이 전쟁이 끝난 날은 아니다. 오히려 그 날은 승리를 위한 결전의 날이었고, 그 때부터 수 없이 밀고 밀리는 그런 일을 반복해 가면서, 디어 마지막 베를린에 입성하는 승리의 날을 맞게 되었다. 그 날이 승리의 날- V-day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아주 잘 적용이 되는데,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는 날이 D-day라는 것이다. 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는 날이 D-day인가?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세상도, 마귀도 죽음의 권세도 이기는 승리를 보장받고 인생을 다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승리의 날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이 바로 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승리의 날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이 승리의 날을 위하여 성령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제부터 승리를 위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비록 이 승리의 날이 이르기까지, 때로는 넘어지고, 쫓기기도 하며, 쓰러지고 고난과 신음과 탄식을 나타내지만, 그러나 탄식이 변하여 영광이 될 것을 약속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한 승리의 나라, 즉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1. 이 승리를 위하여 롬 8:1절은 어떤 선언을 하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선언은 굉장한 선언이다. 왜 인가? 7장까지는 죄 문제를 다루면서 몸부림을 쳤지만, 이제 8장으로 넘어오면서 승리의 팡파르를 불기 때문이다. 7장에서는 <사망의 법과 생명의 법>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는데, 8장으로 넘어오면서 당당히 승리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선언은 완성의 선언은 아니지만, 분명 D-day의 선언이다. 따라서 이후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인내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가노라면 언젠가는 승리를 완성하는 V-day를 얻을 것이다.

 

2. 본문 12절은 어떤 도전을 주는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빚진 것을 청산해 주시면서 승리를 향해 나아가게 해 주신다. 성경이 우리에게 육신에 빚졌다는 것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라는 것이다. 빚진자는 비참하다. 밥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는다. 마음이 늘 괴롭고 불안하고 채권자에게 늘 끌려 다닌다. 그러므로 빚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청산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가 찾아온다. 빚을 다 갚기까지는 자유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진자들로, 불안과 초조와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가운데,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빚을 짊어지고 사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18장에서 보면 많은 빚을 갚을 수 없어서 그저 가지고 있는 소유, 토지, 처자까지 다 팔아서 갚겠다고 했을 때,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주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나는지 모른다. 우리는 종신토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그러한 엄청난 빚- 죄의 빚을 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육신의 빚을 탕감받는 은혜를 입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빚 가운데서 불안하고, 외롭고,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서 살 필요가 없다.

 

3. 15절 말씀에서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고 한다. 양자라는 말은 우리니라 습관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는, 양자는 자신이 낳은 아들보다 때로는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그런 신분이었다. 자기가 낳은 아들은 싫든 좋든 그냥 자식인데, 양자는 이제 이 아들을 내 자녀로 삼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 시험하고 헤아려보고 따져보고 살펴본 다음에 그를 양자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가 되면 재산과 신분을 상속받게 된다.

 

벤허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전함의 노를 젓는 노예로 팔려 간다. 다시 살아날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에 로마 사령관이 이끄는 배들이 마케도니아 군대가 이끄는 배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실의에 빠진 로마군 사령관은 자살을 시도한다. 그 때 그 주인공이 그 장군을 살려주는 그러한 일을 했다. 그래서 그 주인공은 로마의 최고 권력자의 양자가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손에 그 양자된 표시의 반지를 끼고 있게 되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그는 조금도 노예 신분이라고 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로마 권력자의 아들로서 행세를 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자가 되는 그러한 신분의 변화이다. 그런데 그가 그 장군의 양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그 장군을 살려주는 일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장군은 그 주인공을 너무나 눈여겨 보아왔기 때문에 쉽게 양자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 삼기 위해서 어떠한 절차를 밟으셨는가?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양자 하나를 삼기 위해서 저 놈의 성품은 어떤가? 몸은 건강한가! 뭐를 잘 할 줄 아는가?” 등등 여러 가지를 살핀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자 삼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양자 삼는 방법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이가 어찌 다른 것을 아끼겠는가?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양자되고 그 은혜와 더불어 누리는 축복! 이 외에 더 이상의 축복은 없다!!

 

5.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됨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이 근거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다시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양자를 삼으시고 후회함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양자로 삼았다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거 안 되겠다... 해서 되물리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어떤 사람에게는 진하게 적용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흐릿하게 적용이 되서, 적용이 됐는지 안됐는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그렇게 판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은 진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같이 희어지고, 눈같이 희어지는 그런 역사를 이루기 때문에, 그 죄의 흔적이,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다시는 그 죄과를 그에게 묻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아야한다.

 

6. 16절 말씀은 어떤 확신을 주는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은 우리에게 내적 확신을 주신다고 한다.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이 내적인 확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는가? 이것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상고하고, 또 지금처럼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데, 그 말씀의 빛이 비춰질 때, 거울이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처럼, 깨끗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어질 때 그 말씀을 받아 반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예배드려야 할 시간에 예배드리지 못했을 때에 마음속에 오는 그 컬컬함,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못했을 때에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마음들, 누군가를 도우며 봉사해야 할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서 활동하지 못함으로 오는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강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빛,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내적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강하게, 어떤 사람은 약하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에 비춰주시는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점점 더 밝아지고,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또렷하게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확신, 내적인 확신,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충만함을 우리가 잘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7. 17절에서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날에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주님이 누려야 될, 독생자가 누려야 될 그 하나님의 영광, 그 하나님의 지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예수님이 받은 것처럼 우리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우리는 주님 enough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오늘은 때로는 넘어진다. 때로는 상하고 찢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자녀 삼기로 결정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언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들로 세워지기 위해서, 후사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D-day를 거치게 한 자들이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V-day는 얻지 못했다. 우리는 진행 중에 있다. 이러한 결정적인 승리의 날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크고 작은 여러 전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삶의 문제요, 이것을 고난이라고도 말하고, 괴로움이라고도 말하고, 싸움이라고도 말하고, 이것을 풍파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 이 사실을 언급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8. 그런데 이제껏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후원을 강력하게 시사하다가 왜 갑자기 고난이라는 단어를 도입하는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붙드심과 영광에 동참케 하시는 보장에 대한 말씀을 주실 때, “주님 enough합니다라고 말한 자들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복을 확인시키고는, 그 다음에 고난 문제를 언급하시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고난을 감당할 수 있으니까!

 

이 원리는 일찍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적용시킨 원리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많은 능력으로 기적을 보이시며,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함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가를 보이신 후,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받아내었다. 그런 후, “나는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라는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마태는 이 사실을 아주 신중히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때로부터 비로소 고난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다예수님은 이 고난에 대한 말씀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아셨기에, 그가 영광의 절정에 서셨을 때 나는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죽는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처럼 바울도 우선 영광스러운 일들을 먼저 열거하고는 이제 만족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 그러나 고난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을 입고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아가는 인간들인지라, 고난이 찾아오면 그것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23절 말씀을 보면 모든 성도들은 탄식하며, 구속을 기다린다고 한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며 탄식을 하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어야 한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 사탄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고난 앞에서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탄의 함정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확증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 탄식이 있는 이유는,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으나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시며 승리의 날을 맛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글을 썼는데, “숨어 계신 하나님이란 글을 썼다. 그러나 히든카드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안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내어놓아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카드 아닌가? 숨어 계신 하나님! 보이지 아니하는 그 곳에, 손길이 닿지 않는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히든카드가 되셔서, 우리가 실수하지 아니하고 징금 다리를 잘 건너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영광의 자리에 이르도록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9. 26절에서는 또 어떤 격려를 하는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은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시는 것,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런 가운데 우리는 조금씩 주님의 나라를 맛보아 가면서 그 영광의 소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24절 말씀을 보면,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에 목표를 둔다고 한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길에 늘려있는 돌멩이는 보배가 아니다. 땅 속에 깊이 묻혀있는 것, 그 가운데서 하나를 찾아낼 때, 그것이 우리의 보배가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것을 잠깐 소망하며 살지 말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영광을 예비하시고 삶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아버지를 신뢰하며 삶으로 말미암아, 내 삶을 통해서 거룩한 성취- 나를 에워싸고 있던 그 어두움이 변하여, 그 탄식이 변하여 내가 누려야 될 영광을 바라보며 도리어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약속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영광이 예비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너무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탄식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은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그 영광에 이르도록 그가 친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꼭 간직하자. 그러므로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한다. 이 결과는 우리에게 보장 되었다. 믿음으로인내하면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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